한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정주목사, 영흥부사, 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선(子善)
도곡(陶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1년(중종 36)
사망 연도
1616년(광해군 8)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예조정랑|서천군수|정주목사
정의
조선 중기에, 정주목사, 영흥부사, 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선(子善), 호는 도곡(陶谷). 한사신(韓士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석(韓碩)이고, 아버지는 교리 한지원(韓知源)이며, 어머니는 윤박(尹璞)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문장에 힘썼으며, 고시(古詩)로 이름이 높았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80년에 알성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596년에는 중시에 급제하기도 하였다.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삼척부사로 나갔으나 곧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초기에 서천군수로 있을 때 도망갔다 하여 의금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명나라 제독의 접대에 차출되었음이 밝혀져 혐의를 벗었다. 1599년 해주목사가 되었으나 간관으로부터 재주가 용렬하고 치적이 없다는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문과의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사관으로부터 그의 사람됨이 비루하고 천한 행동으로 사류에게 버림을 받았으므로 시관이 될 수 없다는 사평(史評)을 듣기도 하였다.

이듬해 정주목사를 거쳐 영흥부사가 되었으나, 70세 이상의 부모를 둔 수령은 300리 밖에 임명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파직되었다.

1605년 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에 예물로 가져간 만화방석(滿花方席)이 습기에 젖어 변색되게 하였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등 여러 가지 물의를 빚어서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동지중추부사로서 경연특진관에 선발되었으나 사간원으로부터 평소에 명망이 낮다 하여 제외시킬 것을 요청받아 제외되었다.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다는 사관의 평을 여러 차례 들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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