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4인이다. 그 중 2인은 문관이 겸임하였다. 태봉의 사대(史臺)와 고려의 통문관(通文館) 등 종래의 역학기관은 주로 한어(漢語)의 교습만을 담당하여왔는데, 정식으로 교수관이 설치되는 것은 1391년(공양왕 3)의 일이다.
이것은 대중국외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하였기 때문인바,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경국대전』에 몽학·왜학·여진학에는 정9품의 훈도만 2인씩 둔 데 비하여 한학에는 훈도 4인과 별도의 교수관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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