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예조참판, 강화유수,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회이(晦而)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3년(숙종 19)
사망 연도
1748년(영조 24)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대사성|예조참의|예조참판|강화유수| 대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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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예조참판, 강화유수,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회이(晦而).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의 후손으로, 한성우(韓聖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배의(韓配義)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한사범(韓師范)이며, 어머니는 유명흥(兪命興)의 딸이다. 한익모(韓翼謩)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1728년(영조 4)에는 정언·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를 차례로 거친 뒤 영남안렴어사(嶺南按廉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강원도암행어사로 다녀와 울진현감 이식명(李植命)이 본도에 유배 중인 민천효(閔天孝)를 매우 우대하고 있음을 보고하여 파직, 하옥하게 하였다.

또, 양역(良役)의 폐해가 심함을 보고하고, 특히 폐해가 심각한 안협현감 신의집(申義集), 정선군수 송필환(宋必煥), 평창군수 최창억(崔昌億), 낭천현감 이도재(李道載) 등을 파직하도록 하였다.

철원부사 민사연(閔思淵), 고성군수 박필기(朴必琦), 전 안협현감 홍중기(洪重耆) 등을 백성을 잘 다스린 수령(善治守令)으로 상줄 것을 진언하였다.

1732년 경성판관으로 있다가 돌아와 이듬해 응교·집의를 거쳐, 1735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대사성·예조참의·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45년에는 강화유수가 되어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강화성을 개축하는 등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1747년 대사헌이 되었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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