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 화원으로 교수를 지낸 함제건(咸悌健)의 아들이며, 역시 화원으로 교수를 지낸 김구성(金九成)의 사위고, 김두량(金斗樑)의 외삼촌이며, 함도홍(咸道弘)의 아버지이다.
화원으로 도화서(圖畫署)의 별제(別提)를 지냈다. 1718년(숙종 44)『경종선의후가례도감의궤(景宗宣懿后嘉禮都監儀軌)』의 제작에 참여하였고, 1719년 통신사행(通信使行)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733년(영조 9)박동보(朴東普)·양기성(梁箕星)과 함께 영조어진도사(英祖御眞圖寫)에 참여하였으며, 1744년 이성린(李聖麟) 등과 함께 「장조헌경후가례반차도(莊祖獻敬后嘉禮班次圖)」를 제작하였다.
『고화비고(古畫備考)』에 그가 도일시에 그렸던 「부용봉도(芙蓉峰圖)」가 19세기까지 일본땅에 유전하였음을 기재하고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그의 작품으로 「고사책장도(高士策杖圖)」(간송미술관 소장)와 「부사산도(富士山圖)」(1719, 일본 개인 소장) 등이 전하고 있다.
절벽 위에서 화면의 상반부를 가리며 굽어진 소나무를 등 위에 두고 소요하는 고사의 한가로운 모습을 묘사한 「고사책장도」는 소재와 구도, 필묵법과 옷주름 처리 등에서 조선시대 중기에 유행하던 절파풍(浙派風)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으로 보아 그는 조선 중기와 후기가 엇갈리는 전환기에서 보다 전통적인 화풍을 따랐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