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 - 해동명적 ( - )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 중 해동명적 - 김생 필적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 중 해동명적 - 김생 필적
서예
유물
문화재
이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해동명적』을 1530년에 돌에 새겨 석판본으로 개간(改刊)한 법첩.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1970년 12월 30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정의
이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해동명적』을 1530년에 돌에 새겨 석판본으로 개간(改刊)한 법첩.
개설

『해동명적』은 신공제(1469∼1536)가 신라부터 조선 초까지의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를 모아 1515년경 목판본으로 간행한 법첩이다. 여주 이씨 옥산 문중 소장 『해동명적』은 이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해동명적』을 1530년에 돌에 새겨 석판본으로 개간(改刊)한 법첩(法帖: 명필의 글씨를 돌이나 나무에 새겨 만든 서첩)이다. 『해동명적』 석판본 후집 말미에 경상도 관찰사였던 최세절(崔世節, 1479∼1535)의 발문이 새겨져 있어 목판본과 석판본의 간행 시기와 간행 배경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515년경 창원부사로 있던 신공제가 신라부터 조선 초기까지 역대 명필의 글씨를 모아 『해동명적』 목판본을 간행하였고, 1530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최세절이 목판본을 모본으로 돌에 새겨 석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따라서 『해동명적』은 목판본으로 처음 간행되었고 15년 뒤에 석판본으로 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산문중본 『해동명적』은 전집을 둘로 분권한 서첩이므로 후집의 최세절의 발문이 없으나, 임창순(任昌淳) 구장본(舊藏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된 경주 서백당본과 안동 임청각본, 동국대학교 도서관본 등 4군데에 소장되어 있는 『해동명적』에는 후집 말미의 발문이 실려 있다. 발문의 내용에 따르면, 김노(金魯)가 경상도 관찰사 최세절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부친 김희수(金希壽)와 박팽년(朴彭年)의 필적을 첨가하여 석판본으로 간행해 줄 것을 청하자, 최세절이 안동부사 유희저(柳希渚)에게 부탁하여 석공을 모아 돌에 새기게 하고 도사(都事) 안현(安玹)을 시켜 상세한 교정을 보게 하여 1530년 7월에 개간 사업이 종료된 것이다.

내용

『해동명적』은 목판본과 석판본 모두 원래 전집과 후집으로 편집되어 있다. 석판본 전집에는 문종(文宗)부터 무명씨(無名氏)까지 17인의 필적이 실려 있고, 후집에는 최흥효(崔興孝)부터 김희수까지 25인의 필적이 실려 있다. 목판본과 다른 점은 후집에 박팽년과 김희수의 필적이 추가로 모각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박팽년과 김희수 필적의 수록 여부는 『해동명적』의 목판본과 석판본을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 된다.

옥산문중본 『해동명적』은 제2책의 표지 왼쪽 상단에 “해동명적(海東名跡)”이라고 후대에 쓴 것으로 보이는 표제가 있다. 전·후집 중 전집을 2책으로 분권한 것으로, 후집이 없으므로 완본은 아니다. 1책 38면, 2책 44면 도합 82면으로 편집되어 있다. 1책과 2책의 앞쪽에 “독락당인(獨樂堂印)”이라고 새긴 소장인이 찍혀 있다. 1책에는 문종, 성종(成宗), 최치원(崔致遠), 김생(金生), 승 영업(僧 靈業), 승 탄연(僧 坦然), 이암(李嵒), 신덕린(申德隣)까지 8인의 필적이, 2책에는 이강(李岡), 승 혜근(僧 慧勤), 성석린(成石璘), 박초(朴礎), 권근(權近), 하연(河演), 신장(申檣), 무명씨까지 8인의 필적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 승 탄연과 이암 사이에 이제현(李齊賢)의 필적 6면이 있어야 하는데 옥산문중본에는 누락되어 있다. 권근과 하연 사이의 필적 말미에 이첨(李詹),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민자복(閔子復)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 이들 4인의 필적으로 소개되어 왔으나, 이는 필적 말미에 찬자의 이름을 표기한 것일 뿐 모두 권근의 필적이다.

옥산문중본 『해동명적』에 실린 필적은 시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작 시문인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개인 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초고 필적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서풍은 여말선초 이후로 큰 영향을 끼쳤던 원(元)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뿐만 아니라 선우추(鮮于樞)와 강리노노(康里巎巎)의 행초서풍도 여러 필적에 가미되어 있어 원대 서풍의 다양한 수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현황

『해동명적』 석판본은 옥산문중 소장본 외에도 여러 군데 소장되어 있다. 석판본에 들어간 판석(板石)은 최세절의 발문 5면을 포함하여 총 169면이 소요된 것으로 추산되는데, 여러 소장본 중 완본은 하나도 없다. 이 가운데 여주 이씨 옥산문중본과 임창순 구장본, 경주 서백당본은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고 3본을 합치면 한 질의 완본이 된다. 3본의 구입 시기와 문화재 등재 과정 및 소장 위치의 연관성을 미루어 볼 때 3본이 원래 하나로 묶인 완질의 세트본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해동명적』은 우리나라의 역대 명적을 널리 보급하려는 취지에서 간행된 법첩이다. 진적(眞蹟)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초기 명필들의 필적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서예사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또한 여러 간인본들이 석판의 훼손과 분실로 인해 보각된 판본으로 인출된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옥산문중본은 석면에 균열이 없는 초기의 판본으로 인출한 선본이란 점에서 임창순 구장본과 경주 서백당본과 함께 문헌학적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참고문헌

「『해동명적』 석판본 연구」(유지복, 『장서각』 36, 2016)
「해동명적 2책」(임창순, 『도협월보(圖協月報)』 11권 12호, 1970)
집필자
유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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