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지방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다른 지방보다도 뒤늦었으나, 베르뇌(Berneux, S. F.) 주교의 활동과 우세영(禹世永)·이득보(李得甫) 등의 전교로 점차 교세가 늘어났고,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신교(信敎)의 자유가 허용되자 천주교에 입교하는 자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런데 입교한 사람들 중에는 신심(信心)에서보다는 시류에 편승하고자 한 자들도 많아, 그들의 몰지각한 행동은 그러잖아도 천주교세의 신장으로 토착사회와의 마찰이 생길 소지를 내포하고 있던 때에 교안사(敎案事)를 야기 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거기에다 부패한 지방 관리들의 착취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모욕과 박해, 선교사들의 지나친 치외 법권적인 행동, 토지제도의 문란, 새로 대두된 개신교의 교세확장에 따르는 마찰 등, 제반 요인이 작용하여 분규는 해주·신천·재령·안악·장연·봉산·황주 등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처음에 천주교신자들과 일반 민간인들과의 사이에 일어난 분규가 관청과의 분규로 확대되고, 여기에 선교사가 개입함으로써 외교문제로까지 비약되어 사회가 시끄러워졌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1903년 1월 24일 사핵사 이응익(李應翼)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응익의 일방적인 처리와 보부상들을 동원한 행패, 그리고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의 건립 등은 오히려 천주교인들을 더욱 자극시켜, 사태해결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뒤 1904년 프랑스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이 체결되어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점차 교안사가 진정되었고, 곧이어 신교자유가 완전히 허용되자 이러한 교안사는 재발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