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권 30책. 활자본.
1431년 가을에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兪孝通), 전의감정 노중례(盧重禮), 동 부정 박윤덕(朴允德)에게 명하여 1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1433년 6월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1399년(정종 1) 제생원에서 간행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 30권의 구증(舊症)과 구방을 기본으로 하여 다시 향약의 모든 방문들을 수집하고, 또는 널리 방서들을 빠짐없이 모아서 분류, 첨가하여 만든 것이다.
구증이 388이던 것이 959로, 구방이 2,803이던 것이 1만706이 되었으며, 그 밖에 침구법(鍼灸法) 1,416조, 향약본초 및 포제법(炮製法) 등을 합하여 85권으로 되었다. 세종이 권채(權採)에게 서를 명하고, 같은 해 8월전라도·강원도 두 도에서 나누어 간행하게 하였다. 그 뒤 1478년(성종 9)에 복간되고, 1633년(인조 11)에 훈련도감 소활자로 중인되었다.
향약이라는 말은 우리 나라 향토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의미한 것인데, 중국산의 약을 당재(唐材)라고 부르는 데 대한 우리 나라산의 총칭이다.
그런데 세종은 우리 나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우리 나라 풍토에 적합하고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병과 약에 대한 의토성(宜土性)을 강조하여 의약 제민(濟民)에 대한 자주적 방책을 세우고자 향약방을 종합수집한 ≪향약집성방≫을 편집하게 한 것이다.
이 책을 편집하기 위하여 먼저 향약과 당재를 비교, 연구하고, 각 도 각 읍에서 생산되는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고, 그 다음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을 반포하도록 하였다.
① 향약과 당재와의 비교 연구:향약의 이용을 권장하기 위해서는 향약과 당약과의 약효를 비교, 검토하여 그 약성의 차이를 잘 감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1421년(세종 3) 10월 약리에 정통한 황자후(黃子厚)를 부사로서 명나라에 보내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당재들을 널리 구해오게 하였다.
1423년 대호군 김을해(金乙亥), 사재부정 노중례 등을 명나라에 보내 우리 나라의 약재에 대한 질의를 거듭하여 향약과 당재의 약성을 비교, 연구하게 하였다.
그 해 4월 전의감·혜민국·제생원의 청으로 명나라에 가는 사절이 있을 때마다 당약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그 뒤에도 명나라의 사절들과 함께 따라간 우리 나라의 의관들이 명나라의 대의원 태의(太醫)들과 만나 서로 약리 약성을 문의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원래 향약은 산지에 따라 같은 종류이면서 그 이름이나 약성을 달리하고 있으며, 혹은 이름은 같으면서도 품종은 다른 예도 있다.
이런 약성에 따라 당재들도 때에 따라서는 우리 나라산으로 대용할 수도 있었다. 그 한 예로는 우리 나라산의 당귀(當歸)는 중국이나 일본산과는 형태는 비슷하나, 식물학적으로는 다른 종류가 대용되어 있다.
현재 우리 나라 약방에서 석고(石膏)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일본 약방에서 부르는 석고가 아니라 방해석(方解石)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야의 전문의들을 국외에 파견하여 향약과 당재들을 비교, 연구하여 약재의 형태와 약성의 같고 다른 것을 자세히 검색(檢索)하도록 하였다.
② 향약의 분포실태조사:1424년(세종 6) 11월 각 도의 지리지 및 월령(月令)을 편찬하기 위하여 각 도 관찰관에게 명하여 각 도 각 읍에서 산출되는 토산품을 조사하게 하면서, 약재에 있어서는 토산공품(土産貢品)·생산약재(生産藥材)·종양약재(種養藥材) 등으로 나누어 약초들의 분포실태를 세밀히 조사하였다.
이것은 의약을 자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 도 각 읍에서 산출되는 그 분포실태를 먼저 파악하여야 되며, 그 실태의 파악은 어디까지나 현실적 통계조사에 기초를 두어야 될 것은 물론이다. 근대국가들이 제각기 엄격한 국세조사를 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방법이다.
이와 같이, 전국의 팔도에서 산출되는 토산공품과 약재에 있어 생산품과 종양품을 구분하여 조사하게 한 것은 향약의 채집과 재배에 필요한 지식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향약채취월령≫의 간행:이 월령은 1428년(세종 10) ≪향약집성방≫과 같은 편자들에게 명하여 편성하게 하였다. 이 책은 이름 그대로 향약의 채취에 적합한 월령들을 배치하였는데, 수백 종이 넘는 토산약초의 아래에 향명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 다음에는 약미, 약성 또는 봄·가을 채취의 조만(早晩), 음양·건폭(乾暴)의 호부(好否:좋고 나쁨) 등을 자세히 교정하였다.
약초의 아래 향명을 붙인 것은 약용식물을 감식하는 데 있어서뿐 아니라, 우리의 고전어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지만, 채약정부(採藥丁夫)들이 알기 쉽게 향약을 채취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이 때는 ≪팔도지리지≫가 거의 완성되었으므로 이 월령의 편집과 함께 각 도 각 읍에서 쉽게 약초를 채취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의 작업이 모두 끝난 뒤인 1431년 가을 ≪향약집성방≫을 편집하기 시작하여 2년이 지난 세종 15년 6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모든 질병을 57대강문(大綱門)으로 나누어 그 아래 959조의 소목을 나누고, 각 강문과 조목에 해당되는 병론과 방약들을 출전(出典)과 함께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밖에 권두에는 ≪자생경 資生經≫으로부터 채록한 침구목록이 있으며, 권말에는 향약본초의 총론 및 각론들이 붙어 있는데, 총론 중에는 제품약석포제법(諸品藥石炮製法)이 첨부되어 있다.
57병문들을 총괄하여 보면, 분류방법에 있어 인체 부위를 중심으로 한 병문과 병증을 중심으로 한 병문들이 서로 섞여 있어서, 근세 임상의학의 각 분과별에 대한 계통적 지식을 파악하기는 좀 어려운 느낌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 내과 및 전염병·외과·이비인후과·안과·산부인과·소아과 및 치과 등에 이르는 임상 각 과가 거의 망라되어 있어, 종합된 의방서로서 넓은 범위에 걸쳐 자세히 논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인용 서목은 한·당·송·원의 방서가 160여 종이나 된다.
그러나 그 서명들은 ≪의방유취 醫方類聚≫에 인용된 서목과 거의 일치되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인용된 우리의 고유 의방서들의 이름만을 들어보면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본조경험방 本朝經驗方≫·≪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향약혜민방 鄕藥惠民方≫·≪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어의촬요방 御醫撮要方≫·≪동인경험방 東人經驗方≫·≪향약고방 鄕藥古方≫·≪제중립효방 濟衆立效方≫ 등이다.
이상의 방서들은 ≪향약구급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망실되어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그 중 ≪삼화자향약방≫·≪본조경험방≫·≪향약간이방≫ 등은 이 책에 비교적 많이 채록되어 있어 그 원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서명을 특히 향약이라 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고려 후반기부터 민간 노인들이 사용해 오던 향약방을 많이 채집한 데서 우리 고유 의학의 전통을 중국에서 수입한 한의방과 융합시켜 우리 의학의 독자적 전통을 찾아보려고 노력해 온 자취를 넉넉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편집하기 위한 전 작업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향약을 당재와 비교, 연구하고, 또는 각 도 각 읍에 분포된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여 향약의 채취를 시기에 적절하도록 하는 ≪향약채취월령≫을 간행하게 함으로써 이 책의 편성과 함께 당시의 우리 의약적 지식은 어느 정도의 학술적 체계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향약의 아래에 고유의 향명을 붙이게 한 것은 우리 고전언어의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하고 있다. 한독의약박물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