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5년(명종 10) 대형 전투함인 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된 뒤 그 부속선으로 등장하여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협선의 활동상황은 이순신(李舜臣)이 올린 장계(狀啓)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바, 임진년(1592)의 옥포해전(玉浦海戰)에 17척의 협선이 28척의 판옥선과 함께 출동하였다. 같은 해 부산원정 때에 92척의 협선이 전선(戰船) 74척과 함께 동원되었으며, 계사년(1593)에는 전선을 배수(倍數)로 가조(加造)하기로 하여 250척의 사협선(伺挾船)을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협선은 판옥전선의 부속선으로 활동하였으나 점차로 사후선(伺候船)에게 자리를 물려주어, 조선 후기 전선의 부속선으로는 오로지 사후선만 쓰이게 되었다.
영조 때 편수된 『속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군선 총 776척 중에서 각 도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는 사후선은 318척으로서, 전선 117척과 병선(兵船) 161척을 합한 척수보다도 많은데, 협선은 황해도의 각 포에 1, 2척씩 17척과 평안도에 1척을 합하여 18척이 기록되어 있을 따름이다. 또한, 순조 연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사후선이 300척으로 감소되어 있는데 협선은 오히려 29척으로 증가되어 있다.
사후선과 협선은 그 구조와 선형이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고, 다만 정원에 있어서 전자가 타공(舵工) 1인, 격군 4인 등 5인인 데 대하여, 후자는 오직 격군 3인뿐이어서 협선이 보다 작은 배라고 할 수 있다. 협선은 군용뿐만 아니라 삼선(杉船)이라 이르는 민간해선(民間海船)의 종선(從船)으로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