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는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이다. 개항 이후 자유평등사상의 유입과 일본에서 조직된 수평사(水平社)의 영향으로 창립되었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지사 12개, 분사 64개가 조직되었다. 1924년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문제를 두고 대전을 중심으로 결성된 혁신동맹과 대립하였다. 1925년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여 통합하였다.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 문제와 조직 해소와 재결성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면서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1923년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과 실질적인 사회적 처우 개선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1930년대까지 활동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기도 했다.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도록 하고자 하였다.
개항 이후 자유평등사상이 유입되고, 부분적이나마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백정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정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신분 차별의 대상이었는데, 1922년 일본의 특수부락민인 에다[穢多: 屠者]가 신분해방단체인 수평사(水平社)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백정들은 자녀들의 입학거부문제를 계기로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사를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형평사취지서 · 사칙 · 세칙을 채택하고 위원을 선출하였다. 사칙(社則)에 따르면, 진주에 본사(本社)를, 각 도에 지사(支社)를, 군에 분사(分社)를 두며, 형평사의 창립을 주도한 진주 백정 이학찬(李學贊)과 신현수(申鉉壽) · 강상호(姜相鎬) · 천석구(千錫九) · 장지필(張志弼)이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여기에 호응해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었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지사 12개, 분사 64개가 조직되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전국의 지사 · 분사 대표 330여 명이 참가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본사의 서울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결론을 짓지 못하고 다음 총회로 넘겨졌다. 그런데 이전을 주장한 장지필 · 오성환(吳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4월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동맹을 결성하고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같은 날 진주에서도 진주 본사가 주최하는 전국형평사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분열되는 과정에서 본사 이전 문제를 두고 갈등이 표면화되었지만, 실제 원인은 운동방법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이었다. 혁신동맹측이 사회주의적 노선을 지향하려 한 반면, 진주 본사측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양파는 통합을 위한 교섭을 시작해 같은 해 8월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양파는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고 서울에 본부를 두기로 하였다. 이 무렵부터 지방에서 형평청년회 · 형평학우동맹 등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대회 후 진주 본사측은 대전대회의 불승인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양파간에 다시 교섭이 진행되어 다음 해인 1925년 4월 양파가 합동으로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여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뒤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당분간은 내부 결속에만 주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형평 청년들은 개인자격으로 또는 형평청년회 단위로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해 다른 사회운동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26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는 단체의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바꾸었다.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각지의 청년회를 해체하고 사내에 청년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일반 사회단체와 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한다는 등의 청년부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무렵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문제를 둘러싸고 제휴를 주장하는 임평산(林平山) · 심상욱(沈相昱) · 이종률(李鍾律)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전통적인 균등운동을 계속하자는 장지필 · 김종택(金鍾澤) · 길순오(吉淳吾)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는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표면화되었다. 1929년 말부터 1932년에 이르기까지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학생·노동자·농민들이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에 진출하면서 형평사 내에서도 기존의 조직을 해소하고 혁명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을 재결성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형평사는 1931년의 해소 논쟁과 1933년의 일명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겪으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이후 형평사는 경제적인 친목이익단체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5년 4월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영합하는 단체인 대동사(大同社)로 전락하였다.
1923년 창립대회 당시 19개조로 구성된 사칙(社則)에 따르면, 제3조에서 “본사는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제19조에서는 “형평중학을 설립하고 형평잡지의 발간을 도모한다”고 규정하였다. 6개조로 구성된 세칙(細則)은 다음과 같았다.
①야학 또는 주학(晝學)강습소를 증설하고 신문·잡지의 구독을 권장하고 수시로 강연을 하여 상호 지식을 개발케 한다. ②주색 및 도박을 금지한다. ③풍기를 문란케 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④근검절약을 주로 하고 상호부조의 미풍을 조장한다. ⑤본 사원 중 질병 또는 천재(天災)에 걸린 자로서 그 상황이 불쌍한 자에게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구호한다. ⑥본 사원 중 상(喪)을 당했을 때에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위로하고 일반회원에게 주지시켜 상호조위의 덕을 행하게 한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사회 저변에서는 아직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가운데 하위 신분층의 실질적인 처우 개선과 사회적 평등 대우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