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한량은 지방토착 유력층을 배경으로 형성된 계층으로 신분적인 구분에서는 일반양민과 다름 없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 우세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지방의 특수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수전패(受田牌)·무수전패(無受田牌)로 나누어 부경시위(赴京侍衛)를 책임지워 중앙집권적 통제를 가하여왔는데, 이것을 하나로 묶어 1459년(세조 5) 호익위로 조직한 것이다.
즉, 그해 3월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순문진휼사(巡問賑恤使)였던 한명회(韓明澮)의 요구에 의하여 설치된 것이다. 한명회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하삼도(下三道)의 한량 수는 경상도 1,156인, 전라도 458인, 충청도 573인 등으로 이들은 모두 젊고 경제력도 있으나 벼슬길이 넓지 못하여 외방에서 한유(閑遊)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들을 6패(牌)로 나누어 호분위(虎賁衛)에 속하게 하고 별도로 산관체아(散官遞兒)를 마련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번상 3년 뒤부터 그 근무일을 계산하되, 1년 두 차례에 걸쳐 인사행정을 하고 6품에 한하여 거관(去官)하도록 하였으며, 이후의 잡역은 면제하여주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호익위는 지방토착 유력층인 한량으로 하여금 상경 숙위하고 이를 조직화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가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그해 8월평로위(平虜衛)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