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고종 17)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황준헌(黃遵憲)의 저술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국왕에게 바친 뒤, 이의 사본이 항간에 널리 유포되었다.
1876년 개항 이래 중앙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고 전통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유지하던 위정척사 계열의 유생들은, 『조선책략』이 성현을 모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김홍집을 탄핵하고 정부의 실정을 맹렬히 공박하였다.
특히 경상도 예안 유생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하여 1881년에 작성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는 개화정책에 대한 유생의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상소였다. 그 결과 이만손 등이 체포되어 유배를 간 이후에도 척사파 유생들은 계속 상소를 통한 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과거에는 올랐으나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홍시중은, 「영남만인소」에 바로 뒤이어 소를 올려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에 문호를 개방한 것은 실책이지만, 그렇다고 이제 일본과 단교하면 분쟁이 초래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로 조목을 만들어 대일본 관계를 규제하여야 한다는 게 상소문의 주 요지였다.
그는 상소문에서 첫째, 일본과의 사절 교환을 10년에 1회로 제한하였다. 둘째, 개항장인 인천은 요충지이므로 그 주변의 방위를 강화하자고 하였다. 셋째, 무역을 제한하되 그 방법으로 내왕하는 일본 선박의 수를 2, 3척으로, 교역일을 월 2회로 제한하자고 주장하였다.
교역품은 일본의 생산물로 한정하며, 서양 제품을 절대 들여오지 않는다는 전제로 물물 교환만 허락하여 화폐의 사용을 금하고, 조선 상인에게는 5할의 세금을 부과해 일본 상인과의 거래를 줄이도록 제안하였다.
넷째, 『중서견문(中西見聞)』·『만국공법(萬國公法)』·『공사(公史)』·『신보(申報)』·『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속금일초(續今日抄)』·『공업육학(工業六學)』·『조선책략』 등 서양을 소개한 책이나 서양과 일본 책은 모두 압수하여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상소에 대해, 조정에서는 논의 결과 영남만인소사건과 마찬가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결정, 섬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