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본명은 홍종표(洪宗杓).
1902년부터 중국에서 양지사무소(量地事務所)의 일을 보다가 1904년 귀국한 후에 이듬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06년 가와이섬 막가월리 농장에서 송건(宋建)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였다.
그 기관지로 『자신보』를, 1907년 9월에는 하와이 한인협성협회(漢人協成協會)를 조직하고 『한인합성신보』 등을 발간하면서, 한인의 문맹퇴치운동·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가 조직되어 『신한국보(新韓國報)』를 발행할 때 그 책임을 맡았고, 1911년부터는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설립할 때 만주리 지방총회 대표 대리로 참석하였고,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13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였고, 흥사단의 일곱 번째 단우(團友)로 경기도 대표를 맡았다.
1919년 3·1운동 발발 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에서 화교위원(華僑委員)에 임명되어 미주지역의 화교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월에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화교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미주지역 및 캐나다 지역을 순방하면서 임시정부의 공채(公債)를 판매, 독립운동자금을 수합하였다. 이후 주로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였고, 1944년 10월 미주지역 13개 단체가 모여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를 개조하였을 때, 서기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