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언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로 노동 이민하여 신한민보 주필, 대한인국민회 부회장, 구미위원부 화교위원 등을 역임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홍종표(洪宗杓)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사망 연도
1951년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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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하와이로 노동 이민하여 신한민보 주필, 대한인국민회 부회장, 구미위원부 화교위원 등을 역임한 언론인 · 독립운동가.
개설

서울 출신. 본명은 홍종표(洪宗杓).

생애 및 활동사항

1902년부터 중국에서 양지사무소(量地事務所)의 일을 보다가 1904년 귀국한 후에 이듬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06년 가와이섬 막가월리 농장에서 송건(宋建) 등과 함께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였다.

그 기관지로 『자신보』를, 1907년 9월에는 하와이 한인협성협회(漢人協成協會)를 조직하고 『한인합성신보』 등을 발간하면서, 한인의 문맹퇴치운동·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가 조직되어 『신한국보(新韓國報)』를 발행할 때 그 책임을 맡았고, 1911년부터는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설립할 때 만주리 지방총회 대표 대리로 참석하였고,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13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였고, 흥사단의 일곱 번째 단우(團友)로 경기도 대표를 맡았다.

1919년 3·1운동 발발 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에서 화교위원(華僑委員)에 임명되어 미주지역의 화교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월에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의 화교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미주지역 및 캐나다 지역을 순방하면서 임시정부의 공채(公債)를 판매, 독립운동자금을 수합하였다. 이후 주로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였고, 1944년 10월 미주지역 13개 단체가 모여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를 개조하였을 때, 서기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재미한인의 독립운동』(방선주, 1989)
『독립운동사자료집』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집필자
한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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