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 홍득우(洪得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효손(洪孝孫)이고, 아버지는 참찬 홍귀달(洪貴達)이며, 어머니는 김숙정(金淑正)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또 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질정관(質正官)·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되었다. 이어 아버지 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 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집안사람들은 그가 유배의 명을 받았을 때 몸을 피할 것을 권했으나 왕명을 어길 수 없다 해 조용히 길을 떠났다. 해도에 이배 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자만사(自挽辭)』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