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팔각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석조불좌상으로, 전반적으로 마멸되어 세부표현이 뚜렷하지 않으며 광배도 없어진 상태이다. 현재는 1982년에 새로 지은 전각 안에 홍천 물걸리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1971년 지정),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1971년 지정),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보물, 1971년 지정) 등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이 석불상 2구과 대좌는 모두 전각 주변에서 발견된 것이며 이외 금동불상 4점도 수습된 바 있다. 특히 석불 2구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에서 1942년에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화강암제 좌상으로 연화좌가 있고 높이는 1구가 5척 7촌으로 완전하며 다른 1구는 3척 7촌으로 목이 부러져 있으나 조각은 모두 정교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석조여래좌상의 목부분에는 얼굴과 신체를 이어붙인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머리에 표현된 나발(螺髮)은 뚜렷하지 않으며 정수리에 솟은 육계(肉髻) 또한 머리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 코, 입의 마모가 심하여 얼굴 표정을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온화한 인상이다. 어깨는 각이 지고 좁은 편으로 왜소하고 평판적인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이 네모난 형태에 가까운 경직된 상체의 표현은 9세기 중엽 이후 통일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몸에는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는데 가슴 위에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띠매듭이 보이며 그 아래로 몇 개의 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내의 밑의 띠주름 표현은 855년(문성왕 17)에 조성된 경주 창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러한 형식화된 옷주름은 양쪽 팔과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에 보이며 두 다리 사이에 모여진 삼각형태의 옷주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고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왼쪽 다리 위에 수평으로 두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이를 땅의 신을 불러 증명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의 3단으로 구성된 팔각의 연화대좌이다. 하대석은 팔각의 받침대와 8엽의 복련석(覆蓮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받침대에는 각 면에 향로와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새겨진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다. 그 위에 복판중엽(複瓣重葉)의 복련을 8엽으로 돌렸으며 각 모서리마다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2단의 굄 위에 놓여 있는 중대석 역시 각 면마다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새기고 그 사이에는 8구의 신장상(神將像)을 양각하였다. 신장상은 원형의 광배를 갖추고 있지만, 마멸이 심하여 형태가 뚜렷하지 않아 그 존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상대석은 연판 안에 꽃무늬를 새긴 단판앙련(單瓣仰蓮)을 3중으로 돌렸다. 이와 같이 장식성이 강조되어 있는 연화대좌는 9세기 중엽의 통일신라 후기 석불좌상 대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은 전반적으로 아담한 크기와 온화한 인상을 주고 있으나 둥근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의 표현, 왜소해진 신체, 형식화된 옷주름 표현, 화려하고 장식적인 대좌의 특징 등에서 9세기 중엽의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2003년 국립춘천박물관의 발굴조사에 의해 이 석조여래좌상은 석조비로자나불상의 왼쪽에 배치된 석가불상에 해당하며 오른쪽 협시인 노사나불(盧舍那佛 또는 阿彌陀佛)과 함께 삼신불(三身佛)을 이루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우리나라 삼신불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