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건물. 1985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동쪽으로 트인 산기슭 경사진 지형에 3단으로 대지를 조성하고 맨 윗단에 대웅전 · 명부전 · 오백성중전 · 승방 · 요사채 등을 좌우(남북)로 벌려 배치하였으며, 그 아랫단에는 대방[大房 : 보화루 · 화장루]을 배치하였다.
이 가운데 중심 건물은 동향한 대웅전과 대방으로 그 사이에 좁은 마당이 형성되어 있고 이 마당으로의 진입은 대방 향좌측 바로 옆 계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어서, 대웅전 영역은 상당히 좁고 폐쇄적인 중정(中庭)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앞 기단(1925년 축조)은 높이 2m이고 대웅전의 높이는 7.19m인데, 건물은 낙숫물이 기단 밖으로 떨어질 정도로 기단 끝에 바싹 붙여 세워져 있다.
기단 앞쪽에 설치된 9급의 계단은 너비 15m로, 건물 전면의 너비(8.2m)보다 훨씬 넓게 조성되어서 서울 흥천사(興天寺) 극락보전 앞계단과 더불어 특이한 형식을 보여 주는데, 1987년에 너비 2m의 원래 계단을 오백성중전 앞으로 이축(移築)하고, 새 계단을 조성하였다.
주춧돌은 전면에서만 둥글게 다듬고 나머지는 사각형으로 거칠게 다듬은 뒤 원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 : 申觀浩의 글씨)을 달아 불전을 장엄하였다. 현판 글씨는 정학교(丁鶴喬)가 썼다.
벽과 창호의 구성을 보면 전면 3칸은 칸마다 3짝띠살분합문을 달고, 향우측면은 앞툇간에만 외짝띠살문을 달았으며, 배면 · 향좌측면, 그리고 향좌측면 어간과 뒤툇간 등은 모두 판벽(板壁)으로 처리하였다.
건물 내부의 평면 구성에서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뒤로 물려 예불공간을 넓게 쓰려 한 반면 창호를 적게 설치하여 실내를 어둡게 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데, 원래의 벽체를 후대에 판벽으로 개조하면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의 바닥도 후불벽 이면에만 중창 당시의 우물마루가 깔려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모두 쪽마루로 개조되어 있다. 내진고주 사이에 설치된 폭 1칸의 불단은 중대 부분을 4단으로 구성하여 19세기적 특징을 보인다. 천개는 亞자형으로 연봉을 단 헛기둥 사이에 낙양각을 장식하였을 뿐 천장 부분에 입체적인 조각을 늘어뜨리지 않은 간략화된 모습이다.
불단 위의 석가삼존불은 1973년에 새로 봉안된 것으로, 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었다. 대웅전에 정토신앙적인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졌던 것은 화계사가 왕실 원당으로 중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안팎 이출목이고 보간포의 배열은 전면에서 2-2-2, 배면에서 2-1-2, 좌우측면에서 1-2-1이다. 첨차는 폭이 좁고 춤이 높으며 마구리를 직절 · 사절한 형식이며, 살미는 앙서형[仰舌形]으로 연꽃과 연봉을 윗몸에 조각하였는데 전체적으로 곡선의 맛을 살리지 못한 채 둔탁하게 치목되어 있어서 19세기 말의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천장은 내진부는 우물반자, 외진부는 빗반자로 마감되었다. 지붕은 추녀와 처마를 짧게 내밀고 합각 부분을 기둥 훨씬 안쪽에 둔 대신 용마루를 높게 처리함으로써 오똑한 외관을 지니도록 설계되었으나, 기단 밑 마당에서 보면 추녀 끝이 활짝 들려 보인다.
용마루 양끝에는 관청 건물에서만 쓰이던 용두가 배치되어 있어서 왕실 원당으로서의 품격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