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남지(嶠南誌)』(권4, 경주 산천조)에는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나오는데, 신라의 궁인들이 봄놀이를 하며 꽃을 꺾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같은 책 고적 조를 보면 김유신의 맏딸을 묻은 재매곡(財買谷) 근처에서, 꽃들이 만발하고 송화(松花)가 가득한 시기에 집안의 부녀자들이 모여 잔치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오래된 화전놀이의 전통은 조선 전기에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이어졌다. 『조선왕조실록』(권7, 세조 3년 4월 22일(을묘))을 보면, 귀가(貴家)의 부인들이 진달래꽃[杜鵑花]이 필 때 집안의 며느리를 모아 잔치를 벌였는데, 이를 전화음(煎花飮)이라고 했다.
19세기 초 이후 화전놀이는 내방가사인 화전가(花煎歌)와 결합함으로써 전과 다른 양상을 보여 주었다. 특히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반촌(班村)의 여성들은 놀이의 경험을 화전가에 담아 공유함으로써, 화전놀이는 여성문학의 장으로서도 일정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그 뒤 20세기에 이르러 화전놀이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960년대까지 비교적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며 전승되다가 1970년대 이후 점차 봄맞이 관광과 같은 근대적인 여가 활동으로 대체되어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진달래꽃이 필 무렵이면 마을의 여성들이 모여 놀이를 할 장소와 날짜를 정한 뒤 역할을 분담해 놀이를 준비했다. 놀이에 필요한 경비는 화전계(花煎契)가 있을 경우 그 기금으로 충당하고 없으면 각출(各出)해서 마련했다.
놀이 당일 아침이 되면 용모를 단장한 여성들이 모여 함께 놀이 장소로 이동하는데, 보통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산천경개가 수려한 곳이었다. 현장에 도착하면 진달래 꽃잎을 따와 화전(花煎)을 부치고 다른 음식도 장만했다. 푸짐한 먹거리가 마련되면 이를 먹고 마시면서 놀이판을 벌였다. 놀이판에는 춤과 노래가 따랐고 장기 자랑과 꽃싸움도 벌어졌다. 꽃싸움은 진달래의 꽃술을 서로 마주 걸고 당겨서 먼저 끊어지는 쪽이 지는 놀이인데, 때때로 편을 갈라 승패를 가르고 상주(賞酒)와 벌주(罰酒)를 나누어 마시며 즐기기도 했다. 놀이판은 보통 해가 지기 전에 마감되었으며,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귀가하기 마련이었다.
화전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가부장적 이념과 그 실천의 장인 집과 마을을 벗어나, 여성만의 연대 의식을 바탕으로 시집살이의 고충과 불만을 토로 · 공유하고 가무와 놀이를 즐김으로써 집단적으로 신명을 풀어 낼 수 있는 축제였다. 따라서 화전놀이는 여성 문화사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축제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