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 )

근대사
단체
1906∼1945년까지 만주에 존재했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특수 일본회사.
이칭
이칭
만철(滿鐵), 남만철도(南滿鐵道)
정의
1906∼1945년까지 만주에 존재했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특수 일본회사.
개설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South Manchuria Railways Co.)는 러일전쟁 후인 1906년 설립되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중국의 동북지역, 즉 만주에 존재했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특수 일본회사이다. ‘만철(滿鐵)’ 혹은 ‘남만철도(南滿鐵道)’로도 불린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강화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1896년 이후 청국에서 확보한 모든 권리와 특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여순·대련의 조차권과 장춘(長春)-여순간의 철도, 즉 남만철도와 그에 부속한 특권들이다.

흔히 대시베리아횡단철도(Trans-Siberian Railway)의 동아시아지역, 특히 만주리(滿洲里) 부근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톡까지의 노선을 만주횡단철도(동북철도 혹은 동청철도: Trans-Manchurian Railway)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의 중간 부근 지점인 하얼빈에서 요동반도 내 여순까지의 구간을 만주횡단철도의 남부지선이라 하고, 그 지선의 일부인 장춘-여순 간의 철도를 남만철도라 칭하는 것이다.

만철은 바로 이 남만철도와 철도시설 및 그에 부속된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 일본의 국책회사이다. 설립 당시에는 도쿄에 본사를 두었으나, 이후 대련(大連), 신경(新京: 현재의 長春)으로 옮겼고, 도쿄에 지사가 설립되었다. 극성기에는 80여개의 관련기업을 거느리고 있었다. 초대 총재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였고, 1945년까지 40년 동안 17명의 총재가 교체되었다.

만철은 철도사업을 중심으로 광업, 제조업, 호텔업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전개한 복합기업이다. 일본의 만주 식민사업을 수행하는 핵심 기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 패하여 소련이 만주지역을 점령하면서 회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설립목적

남만주철도회사는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와 부속지 경영을 목적으로 1906년 설립되었다. 즉, 동철철도의 남만주지선, 장춘-대련간의 철도 시설 및 부속지, 러일전쟁 중에 물자수송을 위해 건설한 경편철도(輕便鐵道)와 그 부속지의 관리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이 회사의 이름으로 식민침탈을 하였으므로, 흔히 ‘중국내의 일본식 동인도회사’ 혹은 ‘식민회사’라고 불렀다. 만철은 만주지역에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근 40년 활동하는 가운데 많은 식민통치의 유산을 남겼다.

연원 및 변천

1906년 6월 7일, 일본 천황의 명의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성립의건」이 정식 반포되었다. 그해 11월 26일, 일본은 남만철도의 경영을 통해 만주에서 세력을 확대하고자 남만주철도주식회사란 기구를 설치하였다. 이후 일본은 남만주철도 본선(장춘-여순)을 이용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철로 운수사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중국 동북 지역 일부의 철로건설에 투자를 가속했다. 이후 안봉철도(안동-봉천), 무순철도, 우장철도 등의 남만철도 지선이 건설된다.

그 결과 남만철도는 봉천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내려가 중국-조선 국경의 단동(현재의 안동)까지 이르러 한반도 및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되었다. 만철은 이후 만주항공회사를 만들어 만주, 도쿄, 한반도 등지의 국제항공운수업무도 관할했고, 대련에는 만철 산하의 대규모 항구를 보유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철도와 남만철도는 당초 조직과 성질이 달라 상호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압록강철교가 준공되면서 일본은 여러 지역의 연락과 운송을 통일하고자 관영의 조선철도를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남만철도주식회사에 위탁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소유의 전 노선이 한동안 만철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운송이 원활하지 못하여 충분한 수익을 거두지 못하였고, 총독부 측 역시 한반도 통치를 위해 직영 체제로 전환을 요구하였다. 결국 양측의 이해가 일치되어 1925년 4월 1일조선철도는 총독부 산하의 철도국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는 초기부터 함경도 북부 지역에 동해로 연결될 수 있는 루트로 지린〔吉林〕∼회령간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후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만주 통제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신경에서 나진에 이르는 루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에 1933년 10월 1일부터 한반도 내 구간 등 북선선(北鮮線) 구간에 대해서는 대국적 견지에서 만철에 위탁하도록 하였다. 이후 계약 방식과 위탁 구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함경도 북부의 철도에 대해서는 1945년까지 만철의 영향력이 유지되었다.

기능과 역할

남만철도는 설립 초기에, 남만철도를 관리하는 것 외에 남만철도 연변의 양측에 철도 부속지(남만주철도부속지: South Manchuria Railway Zone)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철도 구역은 남만철도 노선 양측 62m 폭의 토지를 포함하면서, 대련-장춘간 700㎞의 간선 및 봉천-안동 사이의 260㎞노선, 그 외 다른 지선을 포함하여 총 연장 1,100㎞에, 250평방 ㎞의 넓이였다. 이 철도 노선은 25개의 도시를 연결하고 있었고, 자기회사, 석탄광, 전기시설, 정미소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설립당시 자본금은 2억 엔이었으나, 점차 경영범위가 확대되면서, 1920년 제1차 증자를 통해 4.4억 엔으로 자본금을 늘이고, 1933년에는 8억 엔, 1940년에는 14억엔으로 늘었다. 일본정부는 만철의 주식 50%를 보유하였다.

1931년 9·18 사건 이후, 만철 및 그들의 모든 사업은 일본군 관동군사령부의 관리감독 하에 들어간다. 일본군이 중국 동북지방 전체를 점령하면서, 원래 중국에 속했던 그 지역의 여러 철로와 동북 전 지역의 항구, 수운, 석탄광산, 강철, 경공업 및 화학공업의 경영권도 무상으로 만철에 넘어갔다. 만철과 부속지 면적은 524.3평방킬로미터로 늘어났고, 만철이 경영하는 철로연장길이도 6857.3㎞에 달했다.

만철 본사는 별도로 조사부를 두었는데, 이것은 일본이 중국에 설치한 최대의 국책조사기관이다. 전적으로 중국과 소련의 정치경제정보 수집업무를 수행했다. 만철조사본부는 중국과 소련에 대한 각종 정보수집공작을 하는 곳으로서 1939년대조사부(大调查 部)로 개칭되었다. 대조사부에는 만철중앙시험소, 만철지질조사소, 대련공사사무소, 만철의원, 만철지방사무소, 만철농업시험소 등이 속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만주철도회사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 및 그의 부속지를 기반으로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만주, 즉 중국의 동북지역에 존재한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흔히 중국내에 설치된 ‘일본식 동인도회사’ 혹은 ‘식민회사’라고 불렸다. 만철의 세력과 그의 조직 변화과정은 결국 일본에 의한 대륙침략정책의 성장과 쇠퇴를 반영한다.

참고문헌

『朝鮮鐵道史』(朝鮮總督府鐵道局, 1929)
『일제침략과 한국철도 1892∼1945』(정재정, 서울대출판부, 1999)
『일본근대사』(강동진, 한길사, 1985)
『일본의 역사』(민두기 편저, 지식산업사, 1983)
위키백과(http:/ja.wikipedia.org/wiki)
『滿鐵四十年史』(滿鐵會 編, 吉川弘文館, 2007)
『近代日本"ニ滿鐵』(小林英夫, 吉川弘文館, 2000)
『日本外交史辭典』
집필자
이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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