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옥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남접대도주로서 동학도들의 집단적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지도자.
이칭
이칭
서인주(徐仁周), 일해(一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3년(철종 4)
사망 연도
1900년(고종 37)
출생지
경기도 수원
관련 사건
교조신원운동|동학농민전쟁
정의
개항기 남접대도주로서 동학도들의 집단적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지도자.
개설

서장옥은 수운 최제우가 남원 은적암에 은둔하는 동안 만난 동승(童僧)으로 후에 최시형과 함께 동학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동학의 양대 조직 중 하나인 남접(南接)의 대도주(大道主)로서 삼례집회를 비롯한 동학도들의 집단적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장옥은 어린 시절부터 절에서 자랐으며, 30여 년 동안 승려로 있다가 동학에 입교했다. 입교한 시기는 1883년경으로 보이며, 입교 후 동학교문의 여러 법식 등을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오지영은 그의 “신체는 비록 작았지만 용모가 특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지심(敬畏之心)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도승(道僧), 이인(異人), 진인(眞人), 궁적(窮賊)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하였다”고 전했다.

서장옥이 1889년에 서울에 갔다가 관아에 체포되자 최시형이 전 교단의 힘을 기울여 석방운동을 벌였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서장옥은 석방 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포교는 물론 교조신권운동을 주도하였고, 갑오농민전쟁 시기 내내 강경파로 활약하였다.

1893년 동학교단 북접에서 준비한 복합상소 때, 서장옥을 중심으로 한 남접 세력은 상경한 동학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무장을 시켜 궁궐을 습격하여 중앙고관들을 제거하고 조정을 개혁하는 혁명적인 항쟁방법을 구상했다. 그 뒤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 또는 전라도 고부(古阜)라는 한 고을의 농민무장봉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서장옥은 1894년 6월에 붙잡혀 갑오농민전쟁의 전반에는 옥중에 있었다가 이후 석방되었다.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9월에 다시 농민군 규합에 나섰다. 그 후 약 5년 동안 행적은 알 수 없지만, 1900년에 경군에 체포되어 동지 손사문과 함께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이이화, 한겨레신문사, 1994)
『동학사』(오지영, 민학사, 1975)
「전봉준의 생애 연구」, (조광환, 『동학연구』12, 한국동학학회, 2002)
「1894년 농민전쟁의 지도부와 서장옥」, (이영호, 『인하사학』3, 인하역사학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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