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베르-고무라 각서 (Waeber-Komura )

근대사
사건
1896년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서울 주재 일본공사 고무라 사이에 조선의 각종 사안을 놓고 교환한 각서.
이칭
이칭
경성의정서(京城議定書), 서울의정서
정의
1896년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서울 주재 일본공사 고무라 사이에 조선의 각종 사안을 놓고 교환한 각서.
개설

「Waeber-Komura Memorandum」, 「경성의정서(京城議定書)」 혹은 「서울의정서」라고도 칭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선의 내정 문제에 관해 잠정적인 타협을 보기에 이른다. 주요 내용은 고종의 환궁과 조정대신의 임명 문제, 부산-서울 사이의 전신선 보호 등에 관한 것으로 전체 4개조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서울 현지에서 수행한 것은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일본공사 고무라였다. 주요 내용은 고종의 신변 안전 및 조선 대신의 임명에 관한 문제, 조선 내의 전신선 보호 문제와 러·일의 경비병 배치 건 등이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모스코바에서 다시 고위의 협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로바노프-야먀가타의정서〔Lobanov-山縣議定書〕」이다.

역사적 배경

거문도사건 이후 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철도 착공을 통한 동아시아 진출은 메이지유신 이래 정한론이 등장했던 일본 조야의 대륙진출 정책과 맞물려 일본 조야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일본의 군비 강화를 재촉하였다. 이후 장래의 러일전쟁은 공공연히 예기된 가운데, 청일전쟁은 그에 앞서 치르게 된 서전(緖戰)이기도 했다.

결국 청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싸고 러·일의 갈등이 본격화 하게 되고, 그 결과 조선에서 나타난 현상이 ‘인아거일(引俄拒日)’ 및 명성황후시해,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난(아관파천) 등이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는 일단 조선의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일본은 타개하고자 하였지만, 일단 양국은 현상태에서 불가피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잠정적 타협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맨 처음 등장한 것이 서울에서 양국의 공사 사이에 체결된 「웨베르-고무라 각서」이다.

이 각서는 청일전쟁 이후 본격화되어 가던 러·일 양국의 갈등의 결과이자, 한반도를 무대로 표출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 군사, 외교적 타협의 하나이다. 조선 현지의 사태가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등으로 비화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된 일본, 그리고 유리한 고지를 한반도에서 점하게 된 러시아 사이에 한반도 내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이해관계를 조정할 필요에 의해 양국이 서울 현지 자국 공사를 통하여 잠정적으로 이해관계를 조정한 것이다.

경과

고종의 아관파천 직후 한반도 내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 당국은 각기 자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서 상대국과의 협약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양국은 아관파천의 현상을 인정한다는 선에서 상호 접근을 모색하게 되었다. 러·일 양국은 서울 주재 공사를 통해 러시아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는 고종의 환궁과 조선 대신의 임명 문제, 그리고 조선의 전신선 보호를 위한 헌병의 배치와 서울, 원산, 인천 등 조선내 주요 지역에 배치할 양국 군사의 규모 등에 대해 상호 의견의 조율을 거치면서 최종 타결을 보게 되었다.

결과

1896년 5월 14일 서울에서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일본공사 고무라 사이에 4개조의 「웨베르-고무라각서」가 체결되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국왕의 환궁은 폐하의 판단에 일임하되, 러·일 양국 대표는 적당한 시기에 조선국왕의 환궁을 충고한다. 둘째, 현 내각은 국왕의 자유 선택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러·일 양국 대표는 금후에도 관대 온후한 인물이 조선의 대신에 임명될 수 있도록 권고한다. 셋째, 부산·경성간을 잇는 일본전신선 보호를 위해 일본군을 헌병으로 바꾸고 대구, 가흥에 50명, 기타 10개 처에 각 10인 씩 합계 200명을 배치하며 장래 조선 정부가 평온을 되찾게 될 때 점차 철수한다. 넷째, 조선의 정황이 평온해 질 때까지 일본은 경성, 부산, 원산에 합계 800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러시아도 동 지역에 일본의 병력 수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위병(衛兵)을 둘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아관파천 직후 조선 문제의 처리를 위해 러·일이 서울 주재 양국 공사를 통해 교환한 각서이다. 그러나 이를 추후 보완하는 의정서가 바로 다음 달 모스코바에서 체결되었다.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기회로 로바노프 외무대신과 일본의 특파대사 야마가타〔山縣有崩〕 사이에 체결된 의정서가 그것이다.

참고문헌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국학자료원, 2002)
이광린, 『한국사강좌-근대편』(일조각, 1982)
최문형, 『열강의 동아시아정책』(일조각, 1979)
外務省外交史料館 日本外交史辭典編纂委員會 編, 『日本外交史辭典』(大藏省印刷局, 1979)
Lensen, George Alexander, Balance of Intrigue-International Rivalry in Korea and Manchuria 1884∼1899, Vol.1, 2(Tallahassee: University of Florida, 1982)
집필자
이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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