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부산광역시) (())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부산광역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
정의
부산광역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북구와 사하구, 서쪽은 경상남도 김해시와 창원시, 북쪽은 김해시 대동면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남해에 연한다. 동경 128°45′~129°00′, 북위 34°59′~35°13′에 위치한다. 면적은 181.50㎢이고, 인구는 9만 4608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7개 행정동(22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에 있다.

자연환경

동쪽 지역은 낙동강 하구의 넓은 삼각주평야이며 서쪽은 구릉성 산지가 있어서 서고동저의 지세를 보인다. 강서구는 낙동강의 동서 분류로 인하여 형성된 삼각주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 하구는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과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거대한 만입부였으나 해수면 상승에 따라 완신세의 두꺼운 충적층으로 이루어진 삼각주가 형성되었다. 대저도, 대사도, 덕도도, 제도, 맥도, 둔치도, 명지도 등이 있으며 이들 하중도들은 1934년 낙동강을 따라 대저 제방을 축조한 뒤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가덕도(加德島)는 연대봉(497m)과 국수봉을 중심으로 산지가 발달했고 동남쪽 해안에는 100m에 달하는 해식애가 형성되어 있다. 구의 서쪽에는 창원시 진해구와 경계를 이루는 보개산(478.9m)과 굴암산(662m)이 있다.

보개산은 장년 산지인 굴암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산릉으로, 바다를 건너 가덕도가 되고 동쪽으로는 봉화산으로 이어져 서낙동강에서 끝난다. 굴암산은 신어산계에 속하며 산세가 험하다. 장년 산지로 동쪽으로는 곰티고개를 지나 옥녀봉에 이어지고 남동쪽으로는 보개산과 연결된다.

구의 동부를 흐르는 낙동강은 크게 낙동강 본류와 서낙동강으로 구분된다. 원래 2개의 큰 유로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농지개량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 본류에 제방을 쌓고, 대저수문과 녹산수문을 설치하면서 서낙동강이 지류가 되었다. 서낙동강은 조선시대에 삼차강(三叉江)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서낙동강은 수문 건설로 본류에서 벗어나 선암강(仙岩江) 또는 불암강(佛岩江)이라 불리게 되면서 낙동강 하류의 지류가 되었다. 대저수문을 통해 유입한 강물은 강동동(대사)에서 평강천으로 갈라지고 김해시 불암동을 거쳐 남으로 흘러 둔치도의 남단에서 조만강을 합류하고 녹산 수문을 거쳐 남해로 빠져 나간다. 이 강은 김해 삼각주평야에 가락동 식만리양수장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낙동강이 남해로 유입하면서 새로운 삼각주로 진우도·대마등 등의 모래톱을 형성하였다. 대마등은 명지동 남쪽 약 1㎞ 거리에 있는 모래톱이다.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있으며 중앙부가 약간 좁다. 길이는 1.8㎞이고, 너비는 최대 130m가 된다. 면적은 0.24㎢이다.

진우도는 신호동 앞 바다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모래톱으로 면적이 658㎡인 유인도이다. 1912년 이전에 생겨난 모래섬으로 왜선등 또는 이점등으로 불렸으나 1956년 이곳에 진우원이라는 고아원이 세워지면서 진우도로 불리게 되었다.

강서구의 대표적인 섬으로 가덕도가 있다. 현재 가덕도동이 위치한 섬으로 면적은 20.78㎢ 해안선 길이는 36㎞이다. 대죽도 등 10개의 무인도가 있으며 부산에서 가장 큰 섬이다. 정상부에 연대봉이 있다.

남해와 접하고 있어 기온의 연교차가 적고, 강수량도 비교적 풍부하다. 겨울철에 바람이 강하여 해상 활동에 지장을 주며, 건조하여 산불재해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4~15℃이고, 강수량은 1,300~1,500㎜ 내외이다. 연평균 풍속은 3~4m/sec로 여름에는 남남서풍, 겨울에는 북서풍의 영향을 받는다.

역사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으며 삼각주평야가 가야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신석기유적으로는 강동동의 북정패총과 가락동의 죽림패총이 독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녹산동과 가덕도의 대항·외양포에도 패총 등이 있다. 청동기의 유적으로는 녹산동 분절지석묘, 가덕도동 두문지석묘가 있고, 강동동 상덕패총, 녹산동 장락패총·분절패총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사료에 따르면 강서구와 김해 일대가 구사국(구야국)·금관국·대가락·가야국 등으로 불리었고, 금관가야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한시대 변진의 교역로는 오늘날 김해시·강서구 등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교역로는 허왕후의 초행길과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강서구와 인접한 김해는 940년(태조 23)에 김해부로 되었다가, 995년(성종 14)에 금주안동도호부로 승격되고, 1002년(목종 5)에 대도호부로 승격됨으로써 이 지역이 중시되었음을 보여준다.

1276년(충렬왕 2)에 부의 민이 안렴사 유호를 살해하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309년(충선왕 원년)에는 목으로 승격되었다. 1311년(충선왕 3) 8월에 부로 개칭되었다. 이처럼 강서구는 김해의 위상변화에 따라 많은 부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후기 김해는 원의 일본 동정에 필요한 군사적 기반인 둔전이 설치된 곳이었다. 원나라는 김해에서 여진의 사람 조양필을 국신사로 삼아 2차에 걸쳐 파견하였고, 한편 일본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군사 5,000여 명을 이곳에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김해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곳이 오늘날의 강서구이므로 이곳은 고려 후기 대일교섭의 진전기지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들어 1413년(태종 13)에 김해가 도호부로 편재되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따르면 봉수대가 강서구 녹산의 성화예산과 가덕도의 천성연대봉에 설치되었고, 1485년(성종 16)에는 녹산의 금단곶보에 석성을 쌓기도 하였다.

1544년(중종 39)에는 가덕도에 가덕진과 천성만호진을 설치하였는데, 임진왜란 후에 안골포로 이전하였다가 1656년(효종 7)에 다시 가덕도로 옮겼다. 이처럼 오늘날의 강서지역은 조선시대 군사의 거점지역으로 대외방어기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많은 왜성을 쌓았는데, 이 지역의 죽도와 가덕도의 성북리와 눌차리에도 왜성이 건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세종 때 삼포를 개항하기 전에는 녹산동 구랑에 왜인이 드나들던 수참왜관이 있기도 하였다.

더우기 이 지역은 임진왜란 때 해전의 격전지로서도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 강서구의 행정동인 녹산동·가덕도동 및 창원시 진해구의 경계지점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전쟁 중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안골포해전과 정유재란 때 원균이 패한 가덕도해전이 유명하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이곳은 1905년 러시아함대와 일본해군의 전투가 벌어진 가덕 외양포해전의 무대이기도 하였다. 러시아해군의 발트함대사령관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해전이 끝난 후 일본군은 다시 강서구에 인접한 진해에 주둔하고 해군통제부를 점령하여 군사령부를 진해로 옮겼다.

강서구는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침략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표출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일제침략에 대한 항거정신이 뿌리 깊게 내려오던 곳이다. 1919년 4월 10일 명지동의 항일의거를 시작으로 4월 11일 천가면의 가덕진의거, 4월 13일 가락면의 봉림리의거가 일어났다.

1906년(광무 10년)에 양산군 대저면이 김해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18년에 읍면 통합으로 김해군 대저면·가락면·명지면·녹산면 및 창원군 천가면이 되었다.

구의 대부분 지역이 1970년대까지 김해군과 의창군에 속했으나 김해군의 일부 지역이 1978년에 부산시의 시역확장으로 북구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 시직할출장소로 독립하였고, 1989년에 김해군 가락면·녹산면과 의창군 천가면이 편입되어 구로 승격되었다.

강서구는 김해국제공항이 위치하고 부산~대구고속도로 등이 개통되면서 교통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들을 바탕으로 명지·녹산지구개발과 신호공단 조성, 지사과학산업연구단지 건설, 둔치도 연료단지조성 등의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부산신항을 바탕으로 가덕도종합개발을 추진하여 공단 배후도시와 항만 등을 조성하여 지역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법정동으로 대저1(大渚一)·대저2·강동(江東)·명지(鳴旨)·죽림(竹林)·식만(食滿)·죽동(竹洞)·봉림(鳳林)·구랑(九郎)·송정(松亭)·화전(花田)·녹산(菉山)·생곡(生谷)·지사(智士)·미음(美音)·범방(凡方)·신호(新湖)·성북(城北)·동선(東仙)·눌차(訥次)·천성(天城)·대항(大項) 등 22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강서구에는 흥국사·관음사·전등사·명월사·용화사·청량사와 명월사지가 있다. 이 중 흥국사는 명월사지의 옛 터로 알려져 있다. 명월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김해도호부 불우조에 기록이 있다.

1708년(헌종 34)에 편찬된 「김해명월사사적비」에 명월사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역사가 오래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나 1618년(광해군 10)에 중건하였고 다시 중수할 때 ‘건강원년갑신삼월남색’이라고 새겨진 기와장이 발견되었다. 건강 원년은 144년(수로왕 103)에 해당된다.

『김해읍지(金海邑誌)』의 「명월사사적비문」에는 수로왕이 높은 산길 아래 만전을 베풀고 허왕후를 맞이하였으며 익일에 궁으로 돌아갈 때 허왕후가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1956년 흥국사 칠성각을 건립할 때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면석 1개와 다른 석제품 조각 1점이 나왔다. 불상과 뱀이 함께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문화교류를 입증하는 자료로도 해석되고 있다. 이 명월사 사왕석은 현재 흥국사에 보관되어 있다.

강서구에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여러 패총과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패총으로 강서구 죽림동에 소재한 죽림패총이다. 대부분은 택지와 경작지가 되어 있지만 주변 지표에는 조개껍질이 흩어져 있다. 죽림패총의 분포범위는 비교적 적어 규모가 작은 패총인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 후기와 말기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 범방동의 죽곡패총, 구랑동과 송정동의 토기산포지 등이 있다.

고분군으로는 송정리고분이 있다. 위치는 송정리 송정마을 뒤편 낮은 구릉의 서북쪽에 있는데, 현재는 배씨의 선산으로 이용되고 있다. 1973년 2월 6일 이곳에서 유개청동합 1점, 청동발 1점, 청동수저 1조, 청동시 1점, 녹주병 1점, 인화문청자완 1점, 백자완 2점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에 고려시대의 분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외에 생곡동의 가달고분군, 성북동의 성북고분이 있다.

지석묘로는 미음동의 분절지석묘와 천성동의 두문지석묘가 있다. 특히 두문지석묘는 천성 두문마을 바닷가 언덕 위에 위치하며 상석은 최대 길이 2.5m, 두께 80㎝ 정도의 괴석으로 보존 상태는 온전하다.

강서구내 문화재로는 범방동 삼층석탑(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이 있다. 신라 석탑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고려 초기의 탑이다. 탑의 북쪽에 법당자리로 추정되는 높이 2m 가량의 평지가 있으나, 축대나 계단 같은 시설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절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이면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성곽, 봉수대 등의 관방 유적과 왜성 등이 많다. 대표적인 성곽으로는 가덕진성지와 천성진성지가 있다.

가덕성지는 성북동에 소재한다. 성의 사방 중앙상부에서는 성문터가 확인되고 성문 좌우에는 정방형의 곡성을 설치하고 성밖은 100m 간격을 두고 바위방책을 설치했던 흔적이 보인다. 현재는 성의 동남쪽 부분만 남아 있다. 이 성은 1544년(중종 39)에 가덕진관과 천성만호진이 설치되면서 축조된 성이다.

천성진성(부산광역시 기념, 1989년 지정)은 1544년(중종 39) 수군 주진인 가덕진관이 성북동에 설치될 때 천성만호진을 설치하면서 중수되거나 재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성벽은 약 960m 정도이다. 폭은 4.5m, 높이는 3.5m이다.

서북쪽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 바깥으로 네모꼴의 치성을 두어 방어력을 높이었고, 성벽 외곽으로 해자를 둘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 송정동에는 금단곶성유적지가 있다.

봉수대로는 녹산동의 성화례산봉수대, 천성산의 연대봉 등이 있다. 성화례산봉수대는 1425년(세종 7) 전국 국경지역에 봉수대를 설치할 당시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봉수대는 남쪽의 가덕도봉수를 받아 북쪽의 분산봉수에 연계한 연변봉수였다. 지금은 복원되어 있다.

천성동에 소재한 천성 연대산봉수대는 남으로 대마도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요충지로서 해안의 방위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봉수는 북쪽으로 녹산동의 성화례산봉수에 연결되고 서로는 웅천의 사화랑봉수에 응하였다.

강서구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축성된 왜성지가 세 곳 있다. 성북동의 성북왜성지는 현재 성의 내성 주위 약 500m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고 외성 주위 약 700m의 토축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눌차리의 왜성은 왜군이 가덕산성과 약 2㎞ 떨어진 가덕진성 그리고 천성보를 견제하고 육지에 있는 안골포왜성에 연락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해발 70m의 산 정상부를 평평하게 깎아서 아래쪽에 3지환, 2지환, 본환으로 쌓아올린 계단형인 왜식 축성법을 쓴 흔적이 있다.

죽림동의 죽도왜성은 가락산에 위치하고 있어서 가락왜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구포에 왜군이 축조한 양산의 증산성과 삼각형을 이루어 낙동강 지류를 이용하여 배를 정박시킬 수 있어 왜군으로서는 긴밀한 연락을 이룰 수 있던 곳이었다. 성벽 일부분이 퇴락한 채 남아있으며 1999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교육·문화

이 지역에서는 개화기 때부터 신학문을 배우고 민족혼을 고취하기 위하여 근대교육기관이 세워졌다. 명지동에는 1907년 동명학교(東鳴學敎)가 면민들에 의해 세워져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이 동명학교는 뒷날 명지초등학교가 되었다.

1936년에는 예수장로회 호주선교회가 동연정마을에 김해복음농업실업학교를 설립하여 농촌 인재를 육성하였다. 초대교장은 윤인구(尹仁駒)였으며 광복 이후 부산 교육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외에 1922년 형설학회, 1927년 배영사설강습소, 1936년 대영학원 등이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7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8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다.

대저1동에 강서문화원이 있다. 1995년 개원하였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 한국문화학교로 지정되었다. 향토사료 수집, 유물·유적조사, 전통놀이 발굴조사, 강서문화지, 고서 번역 간행 등 향토사료조사 및 발간 사업을 하고 있다.

민속

도시에 속해 있으나 많은 인구가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어 전통적인 의례와 세시풍속이 많이 남아 있다. 눌차동에서는 매해 음력 1~2월에 용왕제를 지내고 있다. 용왕제의 내용은 풍어를 기원함이 주 내용이다. 눌차용왕제에서 행해지는 「사자(死者)풀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허! X씨 상좌야 잘 들어라/ 내가 눈 줄 알으리라/ 오늘 같이 좋은 날에/ X씨 상좌 내 상좌야/ 신장님이 하강하되/ 천상옥경 천존신장/ 천상옥경 태을신장/ 거문신장 산신신장/ 당산신장 칠성신장/ 용왕신장 거리신장/ 노중신장 삼천신장/ 삼불신장 공덕신장님이 하강하고/ 팔도신장 나리서서/ 이 터전에 이 도량에/ 영정부정 가리주고/ 악귀잡귀 처결하고/ 산신사귀 요불사귀/ 둔갑사귀 터신사귀/ 일시 결박을 시키시고/ 맑고 맑은 천왕님이 하강하되 ….”의 내용으로 되어있다.

강서구 대항동에서 행해지는 숭어들이는 매년 양력 3월이 되면 숭어잡이가 잘 되게, 산신·여서남·고인이 된 어로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숭어들이 고사」로부터 시작된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단 앞에 서면, 어촌계장이 각 제단에 제주를 붓고, 신위에 대한 감사 및 선원의 무사고와 숭어의 다획을 축원한 다음, 일동과 함께 두 번 배계하고 소지하면 끝마친다.

이후 숭어잡이에 들어가 망대의 어로장이 숭어떼가 그물 안에 들어가면, 그물 입구에서 줄을 당기면서 “밖목선 그물 조리자. 안목선 그물 조리자”라고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 선원들은 그물을 당겨 숭어떼의 출입을 막고, 그 다음에 안잔등 선원들이 그물을 든다.

다음에는 밖잔등·안귀잽이·밖귀잽이가 동시에 그물을 올려 고기를 떠내게 된다. 숭어떼가 몰릴 때에는 주로 북동풍이 불 때이다. 1만 마리 정도 잡으면 만선의 뜻으로 서낭기를 띄우고 입항한다. 이외에 마을마다 당산이 있으며 송정동에 소재한 금단곶보에서는 1992년부터 연례행사로 성터의 수호신에게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죽림동에는 전통민속놀이로 가락오광대가 있다. 김해군 가락면 죽림리에서 1890년대에 시작된 남부형 민속가면극으로, 일제의 탄압으로 1937년에 중단되었다. 1984년에 최상수가 채록한 각본을 입수하고, 1937년까지 놀았던 5명의 증언에 의해, 가면·의상·도구·연기 등을 정리하여 김해오광대로 개칭·복원하였다.

구랑동에서는 매년 봄, 음력 3월 3일이나 4월 초파일에 마을제로서 잠뫼산성놀이를 한다. 해신을 달래기 위해 마을제를 지내고 줄다리기 놀이를 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1년에 한번 주민들이 산성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마을의 평안과 주민들의 화목 단합 및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행사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명지동에는 전통 민속으로 명지알씨름이 있다. 옛 경남지방 씨름의 한 종류로 낙동강 하류 모래사장이 좋은 명지동 조동마을(옛 김해군 명지면)에서 행해진다. 경기는 명절날 명지 6개 마을을 동·서 편으로 나누어서 개인전보다는 단체전을 주로 하였다.

설화·민요

이곳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왕후는 산 바깥쪽의 별포나루에서 배를 매어 두고 육지에 올라 우뚝 솟은 산언덕에서 쉬고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처럼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과 관련하여 많은 전설과 유적을 남기고 있다.

낙동강에 연해 있는 이곳에는 선창노래가 전해지며 이 중 이 일대의 중심지인 구포선창노래가 있다. 2절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1절만 전해지고 있다. 가사는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놓고/ 물결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장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와 같다.

산업·교통

농업은 삼각주와 하안평야에서 주로 이뤄진다. 삼각주로 이루어진 대저 지역은 비옥한 충적토로 되어 있어 농사에 적합한 토질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관·배수가 어려워 농업이 행해지지 못하였다.조선 후기에 들어 비로소 개척이 이루어졌으며 초기에는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대저수리조합이 결성되어 농지개량사업이 행해졌다. 이를 통해 논농사가 활발해졌고, 몽리면적은 1,970정보였다. 1930년대 동낙동강의 하폭을 넓히고 인공제방이 축조되면서 단일 유로를 형성하고, 대동수문과 녹산수문을 설치하면서 서낙동강은 저수지 기능을 하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부산 대도시화에 의해 도시력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 도시 지향적인 농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자본의 농지소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온난한 기후조건을 이용하여 1970년대 이후 소채류, 토마도, 화훼류 등 시설작물이 특화되어 왔다. 일년 중 6월부터 9월까지 벼농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기간은 주로 시설작물을 재배한다. 일부 농가에서는 오리농법 등 친환경농업을 행하기도 한다.

낙동강과 연해 있는 지역은 담수어업이, 해안지역에서는 연안어업과 굴양식 등이 이루어진다. 공업은 대부분의 지역이 그린벨트에 속해 있어 미약하다. 그러나 넓은 간석지를 이용한 임해공단 조성공사가 진행되면서 공업 발전의 잠재력은 매우 크다. 상업은 1차산업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미약하다.

강서구는 부산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서부 경남을 연결하는 남해고속도로의 통과지이다. 동낙동강에는 구포대교, 강서대교, 낙동대교, 을숙도대교가 있다. 서낙동강에는 불암교, 김해교, 강동교, 서낙동강교, 녹산교, 신호대교 등이 건설되어 있다. 남해고속도로가 구의 중앙부를 통과하고, 대구와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가 이곳에서 연결된다.

부산과 진해를 잇는 해안도로가 남부를, 낙동강의 하안도로가 동쪽을 지나 외부와의 교통은 편리하다. 또 가덕도와 경상남도 거제시를 연결하는 거가대교가 2010년에 개통되었다. 부산의 관문인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1958년에 지금의 센텀시티에 비행장을 설치한 것이 부산 항공교통의 시작이었다.

1963년에 수영비행장은 부산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으나 지리적 여건이 맞지 않아 1976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면서 김해국제공항으로 개칭되었다. 2005년에는 부산지하철 3호선 개통으로 강서구청, 체육공원, 대저 등 3개 역이, 2011년에는 부산-김해경천철 개통으로 공항, 대저, 대사 등 7개 역이 설치되었다.

관광

강서구 명지동에는 낙동강 하류의 철새도래지가 있는데,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지역은 동쪽으로는 사하구 다대동에서 장림동·하단동을 경유하여 북구 금곡동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강서구 명지동·신호동에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부가 포함되는 낙동강 유역 일대가 되는데 그 중심지는 명지도와 을숙도이다.

낙동강은 하구에 을숙도를 비롯하여 일웅도(日雄島)·백합등·대마등(大馬嶝) 등 크고 작은 삼각주가 많다. 삼각주 주변은 수심이 얕고 담수와 해수의 교류가 왕성할 뿐 아니라 강기슭에는 갯벌이 발달하여 각종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패류·소형 어류·갑각류·곤충 등 철새의 먹이가 풍부하다.

삼각주의 갈대숲도 철새의 먹이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사철을 통해 이곳으로 오가는 철새는 수백 종에 이르며 오가는 조류로는 오리과·도요새과·백로과·황새과 등 43과 138종 이상이 알려있다.

죽림동에는 과거 낙동강의 경관을 즐기던 금파대가 있었다. 가락동 죽림리 해창 북쪽 오봉산 기슭 고정마을 위에 있었던 것으로 1692년(숙종 18) 금파대에 금파정을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금파정이 세워지면서 당시 김해부의 관속이나 유림들이 이곳을 찾아와 주위 경관을 즐겼다. 금파대란 이곳에서 서낙동강을 바라보면 강바람에 나부끼는 물결이 마치 비단 같다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낙동강과 남해에 연해 있어 먹거리가 매우 풍부하다. 낙동강 지류에는 곳곳에 관광농원이 입지하고 있으며 장어와 민물매운탕이 강서구의 주요 먹거리이다. 녹산과 명지의 어촌에는 횟집들이 밀집되어 있어 어류와 패류들을 팔고 있다. 매년 9월 명지시장 내에서 전어축제가 열리고 있다. 부산 가을 횟거리의 대표적인 어종으로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는 “기름이 많고 달콤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대저동의 주요 농산물인 토마토의 축제가 매년 4월 강서체육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축제기간 중 먹거리장터가 열리며 토마토 먹기 대회, 토마토 요리 전시 등의 행사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체육시설로서 대저동에 강서체육공원이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의 펜싱경기와 배드민턴경기가 열린 실내체육관과 2,000석 규모의 하키경기장, 500석 규모의 보조경기장 및 양궁경기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서체육공원은 종목별 경기장뿐만 아니라 시민체육, 문화센터 등 체육가족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또한 천연잔디구장 2면은 부산아이콘스 및 유소년축구클럽의 전용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강동동 서낙동강 일원에는 조정카누경기장이 있다.

강서구는 낙동강 제방을 시민공원화하여 구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체육시설을 갖추고, 철쭉동산 등으로 조경하여 시민들의 건강 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매년 초여름(5~6월경) 이곳에서 강변축제가 열린다.

동(洞)
  1. 강동동

낙동강 삼각주 북단 서쪽에 위치한 동이다. 선암강의 동안에 위치하고, 동쪽은 남북으로 흐르는 평강이라는 작은 하천으로 대저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선암강은 대동수문에서 대저동의 북쪽을 돌아 강동동의 서쪽을 흐르는 지류이다.

선암강의 동안에 위치한다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대한제국기 김해군 덕도면이었다. 덕도면은 『경상남도여지집성』「김해부지」에 “관문으로부터 1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사(大沙)·상덕(上德)·북정(北亭)·제도리(濟島里)를 묶어 가락면에 편입되었다가 1978년에 부산직할시 북구에 편입되면서 가락동에서 분리되었다.

2 구랑동

구의 서부 내륙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천마산의 봉우리가 아홉 개로 구절봉이라고 하였는데 구절이 변하여 구랑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옛 신라시대 낭관직을 지낸 아홉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불렀다고도 한다. 구랑동은 구랑과 압곡으로 나뉘는데, 압곡은 대압과 소압·잠뫼·송곡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1. 녹산동

구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인근의 녹도에서 유래되었다. 녹산은 녹도가 조선 후기 이후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발달로 인하여 육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34년에는 김해평야에 조수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대동수문에서 들어오는 담수를 조절하기 위해 녹산수문이 건설되었다. 이 수문 위에는 녹산교가 있는데 준공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가장 큰 개폐식 수문이었다.

  1. 눌차동

가덕도 동북단에 위치한 동이다. 섬의 형태가 본섬과는 달리 유난히 완만하다. 눌은 ‘눌어붙다.’ 즉 ‘한군데 오래 있어 지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고, 차는 누우려고 하는 형세를 보이는 동네로 풀이되어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행정동인 가덕도동의 관할 하에 있다.

  1. 대저1동

낙동강 삼각주 북단 동쪽에 위치한다. 강서구의 중심 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지명은 낙동강 어귀에 ‘큰 모래톱’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대저도라고 불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양산군읍지」 방리조에 ‘대상하동방(大上下同坊)’으로 출두리(出頭里)·사덕리(沙德里)·연정리(淵亭里)·대저리(大渚里)·평광리(平光里)·소덕리(蘇德里)·덕두리(德頭里)·사두리(司頭里)·희만리(喜滿里)·니지리(泥池里) 등이 기록되어 있다.

1906년(광무 10)에 김해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두 면을 통합하여 대저면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1973년에 대저읍으로 승격되었다가, 1978년에 부산직할시 북구로 편입되면서 대저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출두·사덕·대지·평강리가 있다.

  1. 대저2동

낙동강 삼각주 중부에 위치한 동이다. 1978년에 부산직할시 북구로 편입되면서 대저1·2동으로 분동되었다. 이 중 사두리는 이 일대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다. 사두리는 모래언덕의 머리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두본리(沙頭本里)라고도 불렀다.

과거 이 마을은 지금의 김해국제공항 자리를 중심으로 울만리(蔚滿里)의 설만마을과 이웃하고 있었다. 1974년에 비행장 확장으로 토지를 수용 당하면서 그때 30호는 지금의 용두마을 자리로 이주하였고, 나머지는 동남쪽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지금의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사두(沙頭)·소덕(小德)·울만(蔚滿)·덕두(德頭)·도도(挑島)·맥도리(麥島里) 등이 있다.

  1. 대항동

가덕도 남단에 위치한 동이다. 천성고개를 넘어 연대봉(烟臺峰)과 국수봉(國守峰) 기슭이 잘록하게 이어지는 목안에 대항마을이 나오는데, 이를 큰목, 한목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음달·양달마을과 세바지·외양포마을이 있다. 행정동인 가덕도동 관할 하에 있다.

  1. 동선동

가덕도 동쪽 해안 상단에 위치한 동이다. 과거 천가면의 동쪽 선창이므로 동선이라는 지명이 형성되었다. 자연마을에는 동선 본동마을과 동쪽으로 향교가 있었던 생교마을이 있다. 행정동인 가덕도동 관할 하에 있다.

  1. 명지동

낙동강 삼각주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동이다. 명지도 전체가 명지동이다. 섬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김해부의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동쪽으로 취도와는 200보 쯤 떨어져 있으며 섬의 둘레가 17리다.”라고 하였다.

지명 유래에 대하여 “큰 비가 오려든지 큰 가뭄이 오려든지 큰 바람이 불려하면 반드시 우는데 그 소리가 어떤 때는 천둥소리, 북소리 혹은 종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섬에서 들어보면 그 소리가 멀어져서 들려오는 것 같으나 어디에서 울려오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지도는 명호(鳴湖)라고도 불린다. 자연마을로는 진목(鎭木)·중(中)·평성(平城)·동(東)·조동(助東)·신전리(新田里)가 있다.

  1. 미음동

강서구 서부 내륙에 위치한 동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풍상산 아래에 화동이 피리를 부는 화동취적형 명당이 있어, 문과오방에 이판서가 날 자리라고 전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미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가난한 한 어부의 노모가 승천하면서 노모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풍악소리와 함께 들려와 미음이라 하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세산·미음·분절·와룡마을 등이 있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1. 범방동

강서구 중부 서낙동강 우안에 위치한 동이다. 범방동은 폐사지가 있던 탑동, 기다랗게 생긴 밭이 많은 마을인 장전·범방, 조만강변 위에 모래 언덕에 생겨난 사구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선사시대 유적지인 범방패총이 발굴되어 일찍부터 주민이 거주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1. 봉림동

강서구 중부의 서낙동강 우안에 위치한 동이다. 갈대가 무성한 저습지였으나, 1953년 김해농지개량조합에서 경지정리를 한 후 옥토로 변하였다. 수박·채소 농사로 유명하여 수박마을로 알려졌다. 가락농업협동조합 수박공판장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봉림·봉하·신기·통전·대흥·해포도·둔치도 등이 있다. 이 중 통전마을은 과거 통제영 소속으로 통전, 통답이라고 불렸다. 행정동인 가락동의 관할 하에 있다.

  1. 생곡동

강서구 중부 서낙동강 우안에 위치한 동이다. 옛 이름은 태야면 생활리였다. 1914년 생활리와 중곡리가 합쳐져 생곡리가 되었다. 마을에서 구랑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매티고개, 성산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소불등고개라 하였다.

범방동의 가리새(가이사)로 가는 생곡나루가 있다. 1941년에 생곡리저수지가 완공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장락·생곡·가달·중곡·마음마을 등이 있다. 이 중 생곡마을은 봉화산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1. 성북동

가덕도 북단에 위치한 동이다. 섬의 관문으로 예로부터 가덕도와 용원을 잇는 도선의 기점인 선창, 밤나무가 많은 율리·장항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성북은 가덕진성의 북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 현재 부산신항만이 자리하고 있다. 행정동인 가덕도동 관할 하에 있다.

  1. 송정동

구의 남단 서부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옛날 바닷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나 지금 솔숲은 사라지고 없다. 옥포는 진해시 웅동면 가동리였으나 녹산면 송정리로 편입되어 송정동의 자연마을로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송정·신총·방근·옥포마을 등이 있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1. 식만동

구의 서부 북단의 김해시와 경계에 위치하는 동이다. 지명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밥맛이 있고 밥그릇에 가득 찬다는 연유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마을로는 식만·시만·중사도마을 등이 있다. 행정동인 가락동 관할 하에 있다.

  1. 신호동

서낙동강 하류의 좌안에 위치한 동이다. 바다 가운데 새로 생긴 섬이라 하여 신도라 했고, 명지면 신전리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신호리가 되었다.

예전에는 염전으로 유명했고 마을 앞 바닷가에는 해송이 일렬로 늘어져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유지하였으나 지금은 공단 개발로 경관이 훼손되었다. 신호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르노삼성자동차 공장이 입지하고 있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1. 죽동

서낙동강 우안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대변청이 있던 죽림마을보다 먼저 형성되어 있던 대나무숲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죽동마을의 동쪽에 있는 봉림마을로 통하는 길목에는 ‘돌틈’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봉림마을, 죽림마을과 남포들을 개간한 때의 통로로서 주막이 있던 곳이다.

죽동 앞의 오봉산 정상에 있는 관수대는 남포들이 홍수 때 물에 자주 잠겨 홍수를 관측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자연마을로는 죽동·송산·금천마을 등이 있다. 행정동인 가락동 관할 하에 있다.

  1. 죽림동

서낙동강 우안에 위치한 동이다. 옛 가락의 중심지로 오봉산이 하나의 섬이었을 때 대밭이 무성하여 큰 홍수가 나면 이 섬이 바다 속에 떠 있는 대섬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죽림·고정·용등마을 등이 있다. 행정동인 가락동 관할 하에 있다.

  1. 지사동

구의 서부 내륙에 위치하며 창원시 진해구와 접한다. 지명은 녹산동의 가장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선비가 글을 읽는 고사독서형의 명당자리에 있다 하여 지사란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첨단과학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명동·지사·신명마을 등이 있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1. 천성동

가덕도 중부 서안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은 이곳에 위치하였던 천성진성에서 유래한다. 봉화대가 있는 연대봉 밑 서쪽에 석축으로 된 천성진성이 있는데 옛날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지금은 민가가 밀접해 있어 성터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자연마을로는 두문·서중·남중마을 등이 있다. 행정동인 가덕도동 관할 하에 있다.

  1. 화전동

서낙동강 하류 우안에 위치한 동이다. 일명 서구지라고 부르고 있다. 서구지는 지금의 성고개가 옛날의 금단곶보로서 ‘곶’이 고지, 구지로 불리어졌고 곶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곶이, 서구지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화전·사암마을 등이 있다. 화전이란 이름 역시 곶이가 꽃으로 변해 그 한자이름인 화전으로 바뀌었다. 남쪽 해안에 큰 바위가 네 곳이 있다 하여 사암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행정동인 녹산동 관할 하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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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통계연보』(부산광역시, 2005)
『구정백서』(부산광역시 강서구, 2005)
『부산교육통계연보』(부산광역시교육청, 2005)
『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 2005)
『한국지리지』경상도편(건설부국립지리원, 2005)
『부산의 민속문화』(세종출판사, 2003)
『부산민요집성』(세종출판사, 2002)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2)
『부산지명총람』(부산광역시, 1995-2002)
『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1993)
『강서구지』(강서구청, 1993)
부산광역시 강서구(www.bsgangseo.go.kr)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김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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