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부산광역시) (())

부산광역시 중구 법정구역도
부산광역시 중구 법정구역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부산광역시의 남부에 위치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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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부산광역시의 남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으로 동구, 서쪽으로는 서구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남항에 연해 있고, 부산대교와 영도대교로 영도구와 연결된다. 동경 129°01'~129°02', 북위 35°05'~35°06'에 위치한다. 면적은 2.83㎢이고, 인구는 4만 581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9개 행정동(41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1가에 있다.

자연환경

북쪽에는 복병산이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보수천·동쪽으로는 영주천이 관내를 흘러 부산항으로 유입한다. 천혜의 양항인 부산항을 끼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해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복병산의 지맥인 용두산이 구의 중앙에 위치해 구를 동서로 나누고 있다. 과거 해안은 대부분 암석해안이었으나 지금은 매축되어 시가지로 이용되고 있다.

대청동에는 복병산(伏兵山)이 있다. 대청동 1가 중심부에 위치하는 용두산과 함께 구릉성 산지이다. 엄광산과 구봉산의 내맥이 바다로 이어지면서 형성된 산지로 주변은 시가지화가 되어 있다. 지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복병막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복병막은 군사 잠복초소로서 초량왜관 안의 일본인들의 난동, 풍기 문란, 밀무역을 막기 위한 시설로서 1739년(영조 15)에 6개소가 설치되었다. 부산포 개항 후 1892년에 복병산 조차에 관한 협정으로 일본인 공동묘지로 이용되었다.

용두산(龍頭山)은 중구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는 구릉성 산지로 부산 시민들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 부산 제1의 휴식공간이자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다. 지명은 산의 모양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보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부산항 일대와 주요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용두산은 부산의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동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일본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던 초량왜관(粱理倭館)은 이 동산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1678~1876),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일본인들의 전관 거류지역이 되면서 용두산 일대가 거의 일본인 거리로 탈바꿈했다. 초량왜관 시절부터 1945년 8·15광복 때까지 일본신사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용두산은 본래 짙은 곰솔(해송)들이 짙은 삼림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송현산(松峴山)이라고 불렸다. 한편 영주동에는 해발 약 40m의 영선산이 있었다. 지금의 중부경찰서와 영주동 사이의 해안선에 따라 위치했던 2개의 독립 구릉으로 쌍악이라고도 불렸다. 1907년 부산포 매립에 필요한 석재를 공급하기 위해 이곳을 깎아내리는 착평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없어졌다. 이들 산지 사이로 형성된 고개로 영선고개가 있었다. 영주동에 있는 지금의 부산터널 입구 삼거리코모도호텔 앞메리놀평원 앞카톨릭센터 앞대청로 국제시장 입구 사거리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있다. 이 고갯길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아스팔트로 포장해 일명 유엔고개라고도 했다.

관내를 흐르는 대표적인 도시 하천으로 보수천이 있다. 구덕산에서 발원해 대신동과 보수동을 거쳐 남항으로 유입한다. 이 하천 지명은 부산포가 개항되고 난 다음에 명명된 것으로 이전에는 법수천으로 불렀다. 법수라 함은 불교의 불법이라 뜻으로, 불법은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정결하게 한다는 것으로 물에 비유해 일컫는 것이다. 법수천 지명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구덕산 기슭에 구덕사라는 오랜 절이 있어 이곳 구덕사의 승려들이나 그 불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개항 후 법수천의 ‘법(法)’을 ‘보(寶)’로 고쳐 보수천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의미는 법수와 동일하다.

남포동에 소재한 남포는 과거 부산시청이 있던 자리에서 보수천 하구를 지나 부산 공동어시장에 이르는 해안으로 남항의 해안에 해당된다. 본래 이 해안은 주먹만한 크기의 옥돌 자갈들로 이루어진 수려한 자갈 해안으로, 일제강점기 때 이곳이 매립되기 전가지만 해도 ‘자갈치’로 불리기도 했으며, 지금도 ‘남포’보다는 자갈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남포’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일본식 지명인 ‘남빈’에서 유래한다.

일제강점기 중 북빈 매축과 남빈 매축공사가 이루어졌다. 북빈 매축은 부산항이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은 1902년에 들어와 부산항을 근대적인 항만으로 조성하기 위해 일본 조차지 앞의 해안, 즉 용미산(지금의 부산 시청자리)왜관 앞의 해안에 이르는 얕은 바다를 매축하게 되었으며, 이를 북빈 매축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북빈’(北濱)이라 함은 일본식 표기로써 용미산을 기점으로 북쪽의 해안(지금의 제1·2부두부산시청까지의 해안)을 일컬으며 이에 대해 남쪽의 해안을 남빈이라 불렀다.

1898년 1월 한말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매축허가를 얻어낸 부산매축주식회사 부산지사는 1902년 7월 북빈 매축공사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두 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제1기 공사는 1902년 7월에 착공해 1905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매축에 투입된 흙과 자갈은 영도와 복병산에서 조달되었다. 제2기 공사는 1907년 4월 착공해 1911년 8월 준공되었으며 그 결과 부산역 부지 일부와 그 남쪽 시가지인 지금의 부산시청에 이르는 중앙로 일대에 8700평의 해안이 매립되었다. 제2기 매축공사에 투입된 건축재료는 인근의 해발 40m의 영선산(또는 쌍악)을 깎아 낸 것으로 이른바 영선산 착평공사에서 얻어진 돌과 흙이었다. 이 때문에 영선산 또는 쌍악이라 불리던 해발 40m의 독립구릉은 1911년 8월 이후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편 북빈 매축의 대역사가 끝나고 나자 1911년 8월 부산항 북항 일대 총 4만 1374평에 이르는 새로운 땅이 조성되었고 이때부터 새마당으로 불리게 된 이 지역은 항만시설은 물론 부산항의 중추관리기능인 부산역·부산세관·부산우체국 등이 건설, 새로운 부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도시화가 빠르게 이루어져 이곳은 당시 일본식 지명으로 새로운 시가지로 등장했다. 북빈 매축이 근대적인 국제무역항의 기능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남빈 매축은 어업전진기지와 연안 무역의 항만 건설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926년에 매축 건설 설계가 완성되면서 1938년 2월에 이르기까지 약 12년 간에 걸쳐 매축 공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제1차로 1931년 5월 지금의 보수천 하구와 남포동 해안 공유수면이 매립되었다. 이어 1938년 2월에는 2차로 지금의 충무초등학교와 완월동 일대 공유수면 3만 4000평이 매축 완료되었다.

바다에 연해 있어 전형적인 온대 해양성 기후를 보여준다. 봄에는 이동성 저기압의 영향으로 비가 자주 오며 여름철에는 온난 다습하다. 겨울철에는 비교적 온화해 기온의 연교차가 적다. 겨울철에 나타나는 저습현상은 대륙성고기압과 함께 부산의 산악 분포에 기인한 소기후 현상이다. 연평균기온은 14.4℃로 1월에 가장 낮고, 8월에 가장 높다. 연평균강수량은 1491.6㎜이다.

역사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소속되었다가 신라에 정복되면서 거칠산군으로 편재되었고, 대증현이 설치되면서 지역적 위치로 보아 이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통일신라 시기에는 “대증현은 신라 경덕왕 때 동평현으로 개명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동평현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1021년(현종 12)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어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梁州郡: 현 양산)에 영속되었으므로 중구지역은 양산의 관리 하에 있었다. 그러나 중구는 조선시대 이전의 거주민 활동은 전하는 역사적인 기록이 없다.

조선 태종대부터 부산포(현 좌천동 일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왜관이 설치되었는데, 중구지역에는 1609년(광해군 원년)에 두모포(현 수정동)에 설치되었던 왜관이 1678년(숙종 4) 초량(현 용두산 일대) 지역으로 이동해 왜관이 설치되면서 국가 간 교류지역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조선시대에 이들 지역은 동래부의 동평면(東平面) 해정리(海汀理)의 일부와 사천면(沙川面), 하단(下端)의 신초량리(新草粱理) 일대가 이른바 초량왜관(粱理倭館)의 자리였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본격 지배하면서 이 지역은 1910년 무렵 종전의 동래부에서 부산부의 관할지역으로 변경되었으며 일본인의 전관거류지, 일본 조계지로 전환되었다. 오늘날 중구지역이 일대 확장과 부산의 중심지로 기능을 하게 된 계기는 이 시기의 매축공사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산, 중구에 북항과 남항에 근대적인 항만이 설립되고 비로소 무역 항구로서의 기능을 하게되었다.

해방 이후 해외 동포가 귀환하고 한국전쟁 때 임시수도가 되면서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이곳 중구를 중심으로 인구가 급증했다. 산록으로 주거지역이 확대되었으며 영주동을 중심으로 불량주거지역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산업화 이후 부산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고층 빌딩이 입지했다. 그러나 도시 확장이 서면 쪽으로 확대되면서 부산시의 중심이 이전되기 시작했고, 시청을 중심으로 하는 공공기관과 사법기관들이 연제구 쪽으로 이전하면서 행정중심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남포동을 중심으로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가 매년 성공적으로 열리면서 중구는 부산의 역사·문화의 중심지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15구·1군 가운데 그 행정구역이 가장 작으면서도 국제시장·자갈치시장 등의 상가와, 수출입 화물선과 국내외 여객선이 입출항하는 부산항의 중심지이자 해상 운송망의 전진기지이다. 또한 행정기관이 이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100여 개의 금융기관과 7000여 개의 사무실이 집중된 행정·상업·중심업무 기능지역이다.

1951년 중부출장소를 설치했고, 1957년 구제 실시에 따라 중구로 개편되었다. 법정동으로는 대청동 1가(大廳洞 一街)·대청동 2가·대청동 3가·대청동 4가·중앙동 1가(中央洞 一街)·중앙동 2가·중앙동 3가·중앙동 4가·중앙동 5가·중앙동 6가·중앙동 7가·대창동 1가(大昌洞 一街)·대창동 2가·동광동 1가(東光洞 一街)·동광동 2가·동광동 3가·동광동 4가·동광동 5가·보수동 1가(寶水洞 一街)·보수동 2가·보수동 3가·부평동 1가(富平洞 一街)·부평동 2가·부평동 3가·부평동 4가·광복동 1가(光復洞 一街)·광복동 2가·광복동 3가·신창동 1가(新昌洞 一街)·신창동 2가·신창동 3가·신창동 4가·창선동 1가(昌善洞 一街)·창선동 2가·남포동 1가(南浦洞 一街)·남포동 2가·남포동 3가·남포동 4가·남포동 5가·남포동 6가·영주(瀛州) 등 41개 동이 있다.

유물·유적

창선동에는 대각사(大覺寺)가 있다. 일본 불교의 한 분파인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 동본원사(東本願寺) 부산별원이 현재의 광복동 대각사(大覺寺) 자리에 세워진 것은 부산이 개항된 이듬해인 1877년이었다. 이 동본원사 부산별원에는 일본인이 한국어를 익혀 한국어 통역을 양성하는 초량관어학소가 있다. 이 사찰은 해방 이후 불교총무원이 되었다가 뒷날 대각사로 이름을 바꾸어 신축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항 이후 일본 조계지가 있었으며 근대 도시화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유적이 많다. 두모포왜관에 있던 왜관이 1678년 초량으로 옯겨오면서 용두산 주위의 왜관을 초량왜관이라고 했다. 이 왜관은 무역거래처가 될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문제를 협상하는 외교무대가 되었다. 지금의 용두산 동쪽의 동광동 쪽 건물을 동관이라 하고 서쪽인 광복동(옛 신창동) 쪽 건물을 서관이라 했다. 이 왜관터는 1876년 개항이 되자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뀌었다. 이 거류지는 바다가 매축되면서 일제강점기 부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초량왜관 관수의 집은 개항이 되자 일본 정부의 부산항 일본 관리관청이 되었다가 1880년 4월 관리관을 영사관이라 이름을 바꾸자 영사관청이 되었다. 지금의 용두산 동남쪽 기슭 동광동 2가에 있었다. 을사늑약 뒤 영사관이 이사관이 되자 이사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부산부청이 되었다. 영사관 건물을 지을 때의 완만한 돌계단은 오늘도 용두산 동남쪽 기슭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사청을 부산부청으로 사용할 때는 청사가 비좁아 여러 곳으로 분산돼 있다가 이후 1934년 부산부청을 세웠다. 과거 중앙동의 시청 본관자리에 해당되며 현재 롯데호텔이 건설 중이다.

영주동에는 대동관이 있었다. 초량왜관이 형성되어 있을 때 왜관을 출입하는 문인 수문과 설문이 현재의 영주동에 있었다. 그 수문과 설문 사이에는 왜관을 관리하는 관아와 함께 객사인 대동관이 현재의 봉래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 이 건물은 조선왕조의 역대 국왕의 전패를 봉안한 곳으로 숙배소라고도 했다. 건물은 곱게 단청이 된 정청 및 동·서현과 좌우익랑으로 되어 있었다. 왜관이 있었을 때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이곳에 와서 우리나라 역대 국왕의 전패에 숙배를 했다.

영주동에 소재한 청관마을은 과거 청국영사관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 마을이다. 이곳은 청나라 조계지로 청관마을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곳에 있던 청국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청국영사관이 설치된 것은 1884년 5월 경이었다. 초대 영사가 부임하자 청국 조계에 관해, 동래감리와 의논해 구획을 결정했다. 조계지는 동쪽은 해변을 따라 314m, 서쪽은 산허리를 따라 같은 거리, 북쪽은 산허리에서 해변까지 303m, 남쪽은 산허리에서 해변까지 275m의 장방형이었다.

청조계지는 청국 이사부를 중심으로 점차 규모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관리와 주민들은 본국으로 귀국하고 일부 남은 주민과 재산은 서울의 영국 총영사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청국인이 다시 조계로 돌아왔지만, 일본상인의 득세로 청국 상권은 크게 떨치지 못했다. 1913년 일본과 청국간에 체결된 재한청국거류지폐지협정으로 청국 조계는 폐지되었지만, 계속 소유권을 인정받아 민족적인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중국인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곳에 계속 거주하면서 차이나타운을 건설했다. 현재도 초량 1동에는 화교협회, 화교소학교, 화교중·고등학교 등이 있다.

대청동에는 러시아 공사관 터가 있다. 현재 부산기상대가 위치한 복병산의 동쪽지대를 러시아가 조차하기 위해 1892년 측량하고 표목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러시아는 조차를 못했지만 그 자리는 지금도 러시아 공사관 터로 불린다.

동광동에는 1914년 백산 안희제 선생이 설립한 백산상회가 있다. 현재 동광동의 동광초등학교 동쪽 아래 백산거리에 있었다. 백산선생은 1885년 경남 의령에서 상경해 신학문을 닦았다. 1910년 한국이 강점당하자 러시아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국내로 잠입해 민족자본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무역회사 백산상회를 설립했으며 독립운동자금의 루트 역할을 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날로 더해가자 1933년 백산상회를 해산하고 만주로 가서 무력투쟁을 위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대일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 11월 국내잠입 중 체포되었고 1943년 서거했다.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이해 옛 백산상회 자리에 지하 2층의 백산기념관이 개관되었고 항일독립정신을 이어받는 산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광동에는 근대 병원의 효시인 제생병원이 있다. 1877년 2월 개원한 일본 관립병원으로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을 위해 세워졌지만 우리나라 사람도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지석영이 1879년 종두법을 배운 곳도 이 병원에서였다. 1937년에 지금의 아미동에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으며 이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현 부산대학교병원)이 되었다.

중앙동의 40계단은 영선산이 착평된 뒤 오늘날의 영주동에서 옛 부산역과 국제여객부두를 왕래하는 편의를 위해 설치된 계단이다. 이 계단의 층수가 40개였기 때문에 이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 계단은 8·15 해방 이후의 귀환동포와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민들이 이 주위에 모여 살며 생계의 방편을 강구했고 또 그 당시에 있었던 동광동과 영주동 판자촌으로 가려면 이 계단을 거쳐야만 했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40계단 층층대에 기대앉은 나그네……’ 라는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한 이후이다. 1993년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뒷면에 경상도 아가씨의 노래 가사와 계단의 유래를 새겨 넣었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이곳에서 근대 교육기관의 효시는 1896년 개교한 개성학교이다. 이 학교는 당시 지역유지들이 자금을 추렴해 현재의 봉래초등학교 남쪽 자리에 교사를 세웠다. 이때 학교 교정에는 백양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1892년에는 공립학교로 인가되고 연이어 수정동에 구관지교, 부산진에 부산진지교, 마산포에 마산포일어학교, 동래에 동래일어학교, 밀양에 밀양개창학교, 경주에 경주계림일어학교, 기장에 기장일어학교 등 지교가 형성되었다. 1909년 부산공립실업학교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 직후인 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가 되었다. 1922년 10월에는 서면 부전동으로 교사를 옮겼다. 지금 당감동에 소재한 부산상업고등학교와 부전동 개성중학교의 모체가 된다.

보수동에는 부산광역시 시립도서관인 중앙도서관이 있다. 1990년 4월 개관했으며 문화학교와 독서교실, 도서실 운영으로 시민문화의식을 제고시키고 있다. 대청동에는 주한부산미국영사관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쓰이던 건물을 1948년 미국이 인수해 미공보원(USIS)으로 사용한 이래 간단한 내부 개조만 했을 뿐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84년 영사관이 개설된 이래 양국 경제와 문화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대청동에는 미국문화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영주동에는 주한부산러시아총영사관이 있다. 1990년 러시아와 국교 수립 이후인 1993년 개설되었다.

산업·교통

중구는 부산시에서 대지와 도로율이 가장 높은데 이는 이 지역 일대가 매립되어 계획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912년 완공된 영선산 착평공사로 현재의 중앙로가 형성되었고, 중앙동·대창동·남포동 일대의 바다가 매립되어 택지와 상가지로 조성되었다. 따라서 매립된 해안의 저지는 주로 도심 중심기능을 담당하며 중심상가지로 발전했다.

또한 남항이 인접해 있어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의 어패류 공급지인 자갈치시장이 위치하며, 제빙공장·수산물가공공장 등이 있다. 남포항은 남항의 내만항으로 남포동 도선장으로부터 자갈치 시장을 지나 부산 공동어시장에 이르는 항으로서 연근해 수산물의 물량항으로서 우리나라 제1의 어항이다. 연안에서 조업하는 소형어선은 물론 멀리 황해와 동지나해 그리고 동해를 주어장으로 하는 중형의 어선들이 출입항하고 정박하는 곳으로 반대편에 있는 영도 남항동의 원양어업항과 함께 어업전진기지로 되어 있다.

본래 남포항은 이곳에 남빈 매축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자갈치’로 불리던 자갈해안이자 남항을 조업무대로 하는 소형어선이 정박하던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매축되면서 남포항은 근대적인 어항으로 발돋움했고 현재는 우리나라 수산업을 주도해 가는 현대적인 어항으로 발전했다.

상업 중 소매 기능은 대부분 광복동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국제시장은 도매기능의 상업이 집중된 곳이다. 국제시장은 한때 국내 최대의 도매시장이었으나 시역 팽창으로 서면 일대에 많은 상업기능을 잠식당했다. 그러나 아직도 단일시장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국제시장이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전시통제물자가 한꺼번에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국제시장 장터는 돗대기시장, 혹은 도떼기시장이라도 불렸고, 1948년에는 자유시장으로 개설되었다.

부산의 상권이 서면 방면으로 이동함에 따라 상권이 다소 침체되었지만, 현재도 여전히 부산 시장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남포동은 서비스업이 밀집된 중심지로 광복동과 함께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지상에 상업시설뿐만 아니라 극장 등의 영화시설, 카메라 취급점 등의 전문상가가 밀집해 있다. 지하에도 상가가 형성되어 롯데1번가 지하상가와 코오롱 지하상가가 있다. 구의 중앙을 관통하는 대청로에는 미국문화원과 인쇄소·출판사 등이 있고 가구점들이 밀집해 전문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보수동에는 대청로의 북쪽 뒷골목에 고서를 취급하는 서점들이 있다. 한편 대청동에는 남일초등학교 정문에서 서쪽으로 향해 이어진 좁은 길 양쪽에는 인쇄업종이 집중되어 있다.

중구의 남북으로는 중앙로가 외부 지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동서로 대청로가 관통하고 있다. 이들 간선도로의 이면에는 좁은 도로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산복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매우 복잡해 전형적인 도심 주택가의 도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영도구와는 영도대교와 부산대교로 연결된다. 부산대교는 중앙동과 영도구 봉래동을 잇는 부산최대의 연육교이다. 1980년 준공되었으며 부산항의 물동량을 원활히 하기 위한 산업도로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한편 남포동에는 자갈치시장과 영도 대평동을 잇는 뱃길이 아직 남아 있다.

서구와는 부산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부산에서 최초로 건설된 터널로서 중구 영주동과 서구 동대신동을 연결한다.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88년 제2터널이 완공되었다. 국제 페리부두와 연안부두가 관내에 있어 해상 교통의 관문 역할을 한다. 영주동에 소재한 국제페리부두는 제1부두의 남쪽 안벽에 해당되며 일본과의 정기여객선 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연안여객부두는 국제여객부두 남쪽인 중앙동 5가 연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해안 일대와 제주도 간에 운항되는 연안여객선의 터미널이다.

중구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현대적인 항만 부두 중의 하나인 제1부두와 제2부두가 있다. 1913년 봄에 준공된 제1부두는 처음에는 부산과 시모노세키 간의 여객선 운항을 위한 선창으로 이용되었다. 해방 이후 국제 해상여객 수요가 증가하면서 1975년 국제페리부두가 건설되어 지금 제1부두는 벌크화물을 취급하고 있다. 제2부두는 제1부두에 이어 가장 오래된 부산항 부두의 하나이다. 1927년 준공된 제2부두는 교역상품 전용 하역부두로 건설되었으며, 그 후 현재까지 잡화전용 부두로 이용되고 있다. 1977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단행해 1979년 지금의 제2부두 기능을 갖춘 현대식 부두가 되었다.

관광

중구 내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는 중구 한가운데 있는 용두산공원이 있다. 특히 이곳에는 부산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부산탑이 세워져 있다. 1973년 완공된 탑으로 부산탑 전신의 길이는 용두산 높이의 2배에 가까운 118m다. 탑의 맨 꼭대기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 지붕에 얹혀 있는 보개를 본떠 만들었다. 휴게실과 전망대에서는 주위의 높은 산과 부산의 남항과 북항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용두산공원에는 이외에도 충무공 이순신 동상, 사월민주혁명희생자위령탑 등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남포동에 위치한 자갈치시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어패류 전문 시장이다. 옛날 보수천 하구 일대는 자갈이 많이 있었는데, 시장이 이 자갈이 많은 곳에 세워졌다는 이유로 지명이 유래되었다. 자갈치시장은 1946년 충무동 해안통 주변을 중심으로 임의단체인 생어상조합이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노점이 번창했다.

자갈치시장은 1986년 현대식 시설로 보수·개선되면서, 수산물 종합백화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92년부터 매년 10월 자갈치수산물축제를 실시하고 있다. 지하철 자갈치역과 남포동역을 끼고 있어, 교통에도 편리하다. 여느 시장과는 달리 어패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갈치시장 동쪽 끝에 건어물도매시장이 있다. 마른멸치·오징어·문어·새우·굴비·각종 포 등 건어물, 김·미역·파래·조개 등 건해산물, 밤·대추·곶감 등 각종 제수용품이나 과일, 나물 등을 주로 판매하고 있다. 전국의 중간 도매상은 물론 일반 소비자에게도 각종 건어물을 싼값으로 도소매하는 부산 제일의 건어물시장이다.

인근 영도다리의 중앙동쪽 다리 양쪽에 생약과 건재약 상점 약 40여 곳이 밀집해 있다. 원래 이 다리목에서 노점으로 민간 제약 재료를 취급하다가 현재는 점포로 발전해 수삼(水蔘)·건삼(乾蔘)·녹용·녹각·부자(附子)·토종꿀에 너구리·산토끼·두꺼비·자라 같은 것을 취급하며 전국적인 상권을 가지고 있다. 보수동에는 헌책방 골목이 있다.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 네거리 건너 보수동 쪽으로 난 사선 방향의 좁은 골목길에 있다.

매년 10월 남포동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개최된다. 초기에는 아시아 국가들만 참석하는 지역 영화제였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규모가 확대되어 세계적인 영화제가 되어 국내영화축제로는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다. 처음에 영화제의 스크린은 남포동에만 있었으나 지금은 확대되어 해운대에서도 열리고 있다.

1994년부터 용두산 일원에서는 부산시와 예총부산지회가 주최가 되어 문화거리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축제 거리는 용두산 주위가 되는 중구 대청동 미문화원에서 미화당백화점을 거쳐 부산호텔 입구 보문당에 이르기까지 1.8㎞ 사이이다. 부산의 전통민속인 동래야류, 용머리울림들과 창작국악의 밤, 야외영화제, 오늘의 춤, 마당극, 중구민 백일장, 전위예술, 교향악단과 팝콘서트 등이 열린다. 자갈치 시장에서는 매년 10월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를 내걸고 축제가 개최된다. 이 축제는 부산의 명물 자갈치시장을 세계적인 수산물시장으로, 그리고 관광명소로 발전시켜 수산물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대청동에는 부산근대역사박물관이 있다. 1929년 지어진 이 건물은 초기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인 1949년부터는 미국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이 되었다. 이후 미문화원이 철수하고, 1999년 대한민국정부로 반환된 것을 그 해 6월 부산시가 인수한 건물이다. 2001년 부산광역시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근대역사관(구 동양척식주식회사부산지점)으로 개관했다. 전시내용은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형성된 부산의 근현대역사를 중심으로 개항기 부산,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 근현대 한미관계, 부산의 비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주동에는 중앙공원이 있다. 일명 대청공원이라 불렸다. 대청공원은 인근의 대청동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부산민주공원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 대청산 기슭에 있는 판자촌을 정리한 후 1983년 충혼탑과 함께 공원조성을 완료했다. 영주동에 있으면서 대청공원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공원고시를 할 때 대청동에서도 가까워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공원의 명칭이 부산민주공원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광동에는 한태공원이 있었다. 과거의 복병산 고갯길 등성이에 수목이 우거진 빈터를 한태공원이라 했는데, 공원 지명은 소를 부리 때의 연장인 한태와 닮아 유래되었다. 남포동의 자갈치시장이 매립되기 전에는 이곳에 남빈해수욕장이 있었다. 부산항 개항장이 왜관지역인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되면서 이 해안은 일본인들의 해수욕장이 되었다.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인근에 송도해수욕장이 개발되었고, 남빈해수욕장은 1914년 폐쇄되었다.

동(洞)
  1. 남포동

구 남부의 남항에 연한 동이다. 초량왜관이 일본전관거류지로 바뀌게 되자, 이권을 부산 주변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먼저 왜관 주변을 둘러싼 석벽을 철거했다. 이후 그 세력이 부평동, 대신동, 영도 방면으로 확대되어갔고, 마침내 영주동과의 사이에 있던 쌍산(용미산)을 제거하고 그들의 거류지는 부산의 조선인 거류지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왜관 중심의 확대가 한계에 다다르자 바다를 매축하기 시작했다. 남항 일대의 용두산 쪽 바닷가는 자갈돌이 많아 자갈치로 불리기도 했는데, 일본인들은 이 지역을 점령한 후 일시적으로 남빈해수욕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용두산 아래의 바닷가였던 지역과 매축된 곳은 일제강점기에는 남빈정이라 불려졌으며, 해방 후에는 영도의 남항동과 구별해 남포동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82년에는 법정동인 대교동 3가와 동광동 1가가 남포동에 편입되었고, 충무동의 1·2·3가는 남포동 4·5·6가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1. 광복동

구의 동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조선시대 초량왜관의 중요 건물은 동관(東館)과 서관(西館)이었는데, 이 건물들은 용두산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갈라져 있었다. 동관은 광복동·동광동 쪽에 있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館守倭家, 48칸), 재판왜가(栽判倭家, 32칸), 개시대청(開市大廳, 48칸) 등의 3대청이 있었다.

1914년 광복동은 변천정(弁天町)·금평정(琴平町)·서정(西町)·행정(幸町)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변천정은 초량왜관 내의 용두산에 있었던 일인의 변재천신사(弁才天神社)에서 따온 이름이고, 서정은 서관(西館)에서 따온 명칭으로서 모두 일본식 지명이다. 해방 후 동명 개칭 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한 곳에서 조국 광복을 기린다는 뜻에서 이 지명이 명명되었다.

이밖에 행정(幸町)은 창선동(昌善洞), 서정(西町)은 신창동(新昌洞)으로 각각 고쳐졌으며, 1956년 법정동(法定洞)인 창전동·신창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포함시켰다. 이후 1977년과 1982년 각각 동광동의 일부가 광복동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1. 부평동

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지명에서 부평동의 ‘부(富)’는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과 같은 뜻에서 사용된 것이고, ‘평(平)’은 터란 뜻으로 샛디의 ‘디’와 통하는 글자로서, 일제강점기에도 ‘부평정’이라 불렸으며, 해방 후 부평동으로 고쳐 현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특히 부평동은 일제시대 제2호 시장인 부평동시장이 있어 유명하다. 제2호 시장은 20인 이상의 사업자가 한 장소에서 상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시장의 상권은 당시 인근 70리까지 형성되어 있어 당시 조선 내 공설시장 중 최대의 것이었다.

  1. 신창동

구의 중앙부에 위치한 동이다. 초량왜관에서 중요건물은 조선 정부에서 지어준 동관(東館)과 서관(西館)이었으며, 이중 서관이 지금의 신창동 일대에 해당된다. 서관에 역시 동대청(東大廳, 20칸), 중대청(中大廳, 20칸), 서대청(西大廳, 20칸)의 3대청이 있고, 각 대청에는 동헌(東軒, 35칸), 서헌(書軒, 25칸)과 2개의 향랑(行廊, 각 56칸)이 있었다. 1914년 신창동은 서정(西町)으로 명명되었고, 이곳은 일본인의 주택가와 상가를 이루고 있었다. 1947년 7월 20일 동명개칭 때 서정(西町)을 신창동으로 고쳤다. 1956년 광복동 관할 하에 두었다.

  1. 보수동

구의 북서쪽에 위치한 동이다. 동 지명은 이곳을 흐르는 보수천과 관련이 있다. 보수천의 옛 지명은 법수천이다. 법수는 불법계에서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정하게 한다는 것을 물에 비유해 일컫는 말이며, 중생의 마음속의 때를 씻어주는 물이란 뜻이다. 보수와 법수는 동일한 의미이다. 당시 초량왜관 안에는 우물이 있어 개항 당시에는 이것을 이용했다. 개항 후 거류 일본인의 증가로 인해 급수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1880년 처음으로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나무 홈통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만들었다. 물이 모자라자 1884년 보수천 상류에 물을 모으는 둑인 집수언을 만들고 자연여과장치를 시공했고, 거류지 가까운 높은 곳에 대청동저수지를 설치했다. 이 상수도 시설은 후에 부산 상수도의 기원이 되었다.

  1. 영주동

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으로 동구와 경계를 이룬다. 옛 이름을 임소이다. 임소라는 지명은 감리서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또 관원이 근무하는 직소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초량왜관이 건립되고 우리나라의 관리인 훈도 별차의 근무처가 감리서 자리였다. 인구증가로 영주 1·2동으로 분동해 현재에 이른다.

  1. 중앙동

구의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개항 후 지금의 중앙동 거리의 아래 지역은 바닷가였으므로 당시에는 시가지로의 발전 여지가 거의 없었다. 매축 공사가 이루어진 후 새로 생긴 넓은 땅의 의미인 새마당이 생겨났다. 이 일대는 행정적으로 좌등정(左藤町)·대창정(大倉町)·고도정(高島町)·경부정(京釜町) 등으로 명명되었는데, 이중 좌등정과 고도정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매축 허가를 내어준 일본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며, 경부정은 경부선 철도의 시발지였다는 데서, 대창정은 부두에서 하역관계로 큰 창고가 있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 일대는 주로 대창정이라는 지명으로 대표되었다. 해방 후 부산역을 가진 중심부라는 뜻으로 중앙동으로 개명되었다. 1982년 5월 1일 법정동인 대교로(大橋路) 1·2·3가가 중앙동 5·6·7가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

  1. 동광동

구의 동부에 위치한 동이다. 초량왜관의 출입문은 수문을 비롯해 북문이 있었는데, 수문의 통행이 가장 많았다. 이 수문을 비롯해 재판옥지, 동향사지 등이 현재의 동광동에 해당된다. 수문은 현재의 동광국민학교의 동편에 있었다. 북문은 대청동의 연혁에서와 같이 평상시에는 늘 열어두고 연향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동광동은 초량왜관시대에 동관이 위치했던 곳이다. 동관은 일본에서 오는 배가 정착하는 곳이며, 왜관의 최고 책임자인 관수의 집과 직접 거래가 이루어졌던 곳이어서, 일본 조계가가 되자 본정이라 이름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일본식 지명의 폐기에 따라서, 동관이 있던 자리라는 의미와 광복동의 동쪽에 위치하는 점 등을 고려해 동광동으로 바뀌어져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1. 창선동

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이다. 창선동은 개항 이후 일본인의 전관거류지에 속했던 지역이다. 1914년 광복동은 변천정(弁天町)·금평정(琴平町)·서정(西町)·행정(幸町)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중 행정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창선동에 속했다. 1956년 광복동의 관할 하에 두었다.

  1. 대청동

구의 북부에 위치한 동이다. 초량왜관 북쪽 담장 밖에 있는 수문 너머에 연향대청이 위치했다. 연향대청은 일본사신을 맞이해 동래부사나 부산첨사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연대청이라고도 불렀다. 동 지명은 이곳에서 유래한다. 연대청 앞에는 유원이란 액자가 붙어 있어서, 연대청은 일명 유원관, 유원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유원은 먼 곳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지만, 이보다는 『서경』의 유원능통, 즉 문화국이 미개한 나라를 제어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연향대청은 현재의 남일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했다. 1982년 법정동인 복병동이 대청동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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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리지』경상도편(건설부국립지리원, 2005)
『부산의 민속문화』(세종출판사, 2003)
『부산민요집성』(세종출판사, 2002)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2)
『부산지명총람』(부산광역시, 1995~2002)
『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1993)
부산광역시 중구(www.bsjung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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