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의암 사적비 ( )

진주 의암 사적비 전경
진주 의암 사적비 전경
서예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조선후기 왜장을 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비. 시도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조선후기 왜장을 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비.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에서 성이 함락되어 7만의 군·관·민이 순절하자, 진주 남강의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한 논개(論介, ?∼1593)의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현재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으며, 2000년 1월 3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 진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광해군 12)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진주지역 사민들은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남강변에 제단을 마련하여 논개의 혼을 달래는 한편, 논개의 의로운 사적을 인정해 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논개의 사적을 잊지 않기 위하여 1722년(경종 2) 진주의 선비 명암(明庵) 정식(鄭軾, 1683∼1746)이 『어우야담』의 기록을 바탕으로 지은 비문을 내용으로 담아 이 사적비를 세웠다. 이후 1741년(영조 17)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 1688∼1742)가 왕의 특명을 받아 비각을 세우고 ‘義妓論介之門(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내용

비석의 높이는 145㎝이며, 너비는 60㎝, 두께는 15㎝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홀로 가파르게 우뚝 선 바위에 그녀가 서 있구나. 그녀가 이 바위 아니었다면 어찌 죽을 곳을 얻고, 이 바위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찌 의로움을 들었겠는가. 남강에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운 정절이로다.(獨峭其巖 特立其女 女非斯巖 焉得死所 巖非斯女 焉得義聲 一江高巖 萬古芳貞)” 이 비는 진주성 내에 위치하며 아래의 남강 의암과 마주하고 있어 논개의 순국정신을 더욱 흠모케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사적비는 금석자료로서 임진왜란 당시의 진주성 모습과 논개의 순국 정신을 일깨워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참고문헌

『진주시사』(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문화재청(http://www.cha.go.kr)
집필자
강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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