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당 ()

현대사
단체
1946년 9월 남한 내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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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1946년 9월 남한 내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
개설

1946년 9월 15일재미한족연합회·청우당·신한민족당 등 8개의 군소정당이 경운동 천도교강당에서 김원용(金元容)의 사회로 창당식을 거행하였다. 김붕준(金朋濬)이 개회사를 하였고, 김호(金乎)를 임시의장, 김령(金嶺)·조기엽(趙基葉)을 임시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최천(崔泉)의 경과보고, 이응진(李應辰)의 취지설명, 김규식(金奎植)의 축사, 하지 중장을 대신하여 스티븐슨 소좌와 러취 장관을 대신한 윔스 소좌의 축사 등이 있은 다음, 김희섭(金喜燮)이 ‘선언’을, 권정식(權廷植)이 ‘정책’을, 김충규(金忠奎)가 ‘당헌’을 낭독하여 만장일치로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유동열(柳東說)·김붕준·김호·한시대·김충규·김만수·이응진·조기엽·김희섭·김령 등 105명을 중앙위원으로, 박치호·김호엽 등 9명을 감찰위원으로 선임하였다. 또 ‘자주독립국가의 완성과 민주주의정치의 실현을 기한다’, ‘국민의 평등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제도의 확립을 기한다’, ‘민족문화의 건전한 발양으로서, 인류문화에 공헌함을 기한다’는 요지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서울시 종로 2가 100번지에 본부를 설치했다. 초기 조직을 살펴보면, 위원장: 이용(李鏞), 부위원장: 김붕준, 총무부장: 박양곡, 차장: 장철, 정치부장: 권정식, 차장: 이용기, 외교부장: 김충규, 차장: 김현구, 기획부장: 최천, 경제부장: 박동직, 재정부장: 김한욱, 선전부장: 김병순, 조사부장: 홍상희, 조직부장: 김령, 문화부장: 장도빈, 노동부장: 김만수, 농민부장: 김재덕, 청년부장: 강인봉, 부녀부장: 윤동명 등이었다.

기능과 역할

신진당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고, 김호가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11월 한민당과 남로당을 제외한 주요 정당이 참여하여 결성한 각정당협의회·긴급시국대책간담회에 참여하는 등 중간파 노선을 지향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중간노선을 표방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한민당 등 보수 우익세력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1946년 10월 23일 정오 시내 광화문통 인민당회의실에서 신진당 주최로 독립노동당·청우당·한국독립당·공산당(대회파)·신민당(대회파)·사회민주당·인민당(31인측) 등 8정당 대표 38여인이 집합하여 남조선 민중소요사태에 대한 간담회를 개최”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중간파로서 신진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뒷받침한다.

1947년 10월 19일 당내 재미한족연합회계(김호·김원용)는 건민회의 이극로계·민주통일당·신한국민당·민중동맹 등과 함께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창당에 합류하였고, 이어서 12월 20일 결성된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에도 참여하였다.

1948년 3월 1일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발표되자, ‘민족총의에 배치된다’면서 반대하였다. 이해 4월 남북협상 시 당대표인 이용과 김충규·김령 등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이후 당 운영은 김붕준 등 우파성향의 인물들이 주도해 갔다.

6월 16일 민족자주연맹과 한독당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반일제투쟁위원회(反日帝鬪爭委員會)에도 참여하였는데, 이 단체에서는 “맥아더사령부는 일본에 상륙한 이래로 우리로 하여금 많은 의혹을 금치 못하게 하였으니 천황제의 존속도 그 하나요, 전범의 대우도 그 하나요, 산업재건의 범위 내용의 괴이함도 그 하나요, 재무장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패망하였다 할지나 왜제(倭帝)는 완전히 거꾸러지지 않고 오만불손하게도 재차 극동의 공장으로 자처하고 조선·중국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재일동포에 대한 박해 모국어 교육의 탄압은 우리들에게 중대한 민족적 각성을 촉구한 바 있거니와 조선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책임을 가진 우리들은 3천만동포와 함께 궐기하여 일제의 재침략의 위협을 받는 중국 기타 제민족과 함께 야만 일제의 재기를 철저히 분쇄할 것을 맹서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전인민과 함께 일본점령의 직접 책임을 진 맥아더사령부에 대해서 엄중히 항의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6월 23일 이 기구는 ‘일본재무장대책협의회(日本再武裝對策協議會)’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좌익세력은 배제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간노선을 표방한 신진당 등 군소정당의 우경화로 해석될 수 있다.

7월 21일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진회(統一獨立促進會)가 결성되었는데, 신진당도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통일지향세력이 결집한 느슨한 형태의 협동전선 성격을 띠었는데, 친북 성향의 통일운동세력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

김구 암살 이후인 1949년 8월 20일 한독당 등 11개 정당사회단체가 ‘대한민국의 지지’를 명백히 표방하며, 민족진영강화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신진당도 이에 참여하였다.

1950년에 들어 대다수의 중간파 정치조직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다. 1950년 1월 신진당은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북한괴뢰집단 소위 ‘대의원’ 이용(도시경영상)·김충규·김령·이창빈·김철수·윤수·윤용준·이진·이욱·김영은·박재섭·이원구와, 소위 ‘조통(祖統)’ 대표 김규헌·김호동 등을 소환함과 동시에, 소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허구를 지적하는 바이며, 본 당은 북한 괴뢰집단과 아무런 정치적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이신철, 역사비평사, 2008)
『이승만의 집권초기 권력기반 연구』(김수자, 경인문화사, 2005)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박명림, 나남출판, 2003)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도진순, 서울대출판부, 1997)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서중석, 역사비평사, 1992)
『대한민국건국청년운동사』(건국청년운동협의회본부, 1989)
『자료대한민국사』1∼7(국사편찬위원회, 1968∼1974)
집필자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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