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한개마을은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는 조선 전기 진주목사 이우 관련 마을이다. 2007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이우가 1450년경에 입향하였다. 이후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씨족마을로 번성하며 성산이씨 네 파가 모여 살고 있다. 한개마을은 다섯 개의 작은 마을들이 하나의 큰 마을을 이루는 구조이다. 마을은 엄격한 원칙에 따라 조성되었는데 여성의 공간이 폐쇄적인 점이 특징적이다. 마을의 대표적인 전통가옥인 하회댁은 1750년경에 지어졌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은 9개 동이다.
한개마을은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 1587∼1612)에 와서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온전히 자리 잡는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이수성(李壽星, 1610∼1672)이 있었는데, 수성은 달천 · 달우 · 달한 · 달운 등 네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마을에 정착하여 각각 백파(伯派) · 중파(仲派) · 숙파(叔派) · 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되고 각 파의 자손들이 마을공간을 본격적으로 일궜다. 따라서 이 마을이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번성한 것은 이수성 때인 17세기 중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하나, 현재는 69호의 집이 있다. 마을을 구성하는 집들 가운데 하회댁은 1750년경에 지어졌으며, 대산동 교리댁, 대산동 북비고택, 대산동 한주종택은 1700년대 후반에, 그리고 다른 큰 한옥들은 대개 1800년대에 건축되었다. 6·25전쟁 때에는 큰 피해를 입어 여러 채의 한옥이 파손되거나 완전히 소실되었다.
과거에 한개마을은 대체로 안길을 기준으로 다섯 부분으로 나뉘었다. 주거지의 뒤쪽 중앙부를 한개 또는 윗마라고 부르고, 그 동쪽과 서쪽을 각각 동녘, 서녘이라 했다. 그리고 진사댁 앞의 동서방향 길 주변은 도촌, 그 아래는 아랫막 또는 아랫마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린 성산이씨의 네 파는 모두 자손을 두었고 차남 이하의 자식들은 분가를 해나갔다. 그런데 네 파의 자손들은 뒤섞여 살지 않고, 대체로 같은 파에 속하는 집끼리 모여 살았다. 대체로 윗마와 서녘에는 백파와 숙파의 자손들이, 동녘 · 도촌 · 아랫막에는 계파의 자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그 결과, 네 파 중 가장 번성하여 학문적으로 또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산 윗마와 서녘에는 격식을 갖춘 한옥들이 많이 지어졌다. 반면, 그밖의 공간에는 일반 민가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개마을에는 첨경재(瞻敬齋), 월봉정(月峯亭: 한천서당(寒川書堂)), 서륜재(敍倫齋), 일관정(一貫亭), 귀락정(歸洛亭: 여동서당(餘洞書堂)) 등 다섯 동의 재실이 있어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 등 많은 선비들이 살던 마을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19세기부터 마을의 좌우 외곽부에 지어진 이 재실들은 서당을 겸하였다.
이 마을의 공간을 구성한 중요한 특징은 여성 공간을 마을공간에서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깊숙이 배치한 것이다. 주거지 끝에 위치한 한주종택과 대산동 월곡댁에서만 샛길이 생략되었을 뿐, 각각의 집들에서는 언제나 안길, 샛길, 사랑채, 안채의 배열순서가 지켜졌다. 이러한 공간의 연계과정에서 안채가 가장 안쪽에 놓인다. 안채의 형태가 한주종택과 북비고택에서는 일자형, 월곡댁과 교리댁에서는 ㄱ자형, 하회댁에서는 ㄷ자형 등으로 다양하지만, 여성의 활동공간인 부엌이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따라서 부엌의 위치는 동쪽이나 서쪽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진입하는 샛길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변함없는 원칙은 부엌을 마을공간(진입로)에서 가장 먼 곳에 둔다는 것이다.
이같이 한개마을은 엄격한 원칙에 따라 조성되었다. 그 원칙이 여성을 폐쇄적인 공간에 위치시키려는 봉건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유교 원리주의자들의 마을답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원칙을 따르려면 어떤 공간이든 절대적 위치에 고정시킬 수 없다. 공간의 위치는 그 성격, 그리고 집이 놓이는 구조적 맥락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한개마을 집들에서 사당의 위치는 이런 상대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가묘를 정침(正寢)의 동쪽에 두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 중인 이상 계층의 주택에서는 사당을 정침의 동쪽에 별동으로 두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한개마을이 주자의 학문을 잇는 학자들의 마을임에도 그 지침이 지켜지지 않았다. 집의 동쪽에 있는 진입로로 들어가는 한주종택에서는 사당이 정침 안채의 동쪽에 위치하지만, 서쪽 진입로로 들어가는 교리댁 · 북비고택 · 월곡댁에서는 사당 영역이 사랑채 뒤쪽이나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뒤쪽에 놓임으로써, 사당이 안채의 서쪽에 오게 되었다. 그 이유는 유교사회에서 남자 주인이 사당에 모셔진 조상의 신주에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드렸기 때문에, 사당을 남성 영역인 사랑채와 근접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작은 마을들이 하나의 큰 마을을 이루는 한개마을에서, 마을이란 성장하고 또 쇠퇴하기도 하는 유기체임을 알 수 있다. 마을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와 밀접히 관련되었으며, 마을공간을 구성하는 논리와 원칙이 분명히 존재하였다. 그런데 그 논리는 『주자가례』와 같은 교과서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얻어진 현실적인 원칙이었다.
성주 한개마을은 우리 전통마을과 한옥이 원칙과 규범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음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