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시황(秦始皇)의 폭정을 피해 산시성(陕西省)의 상산(商山)에 은거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 녹리선생(甪里先生) 네 사람의 백발 고사들의 일화 가운데 바둑을 두며 세상사와 초연하게 살았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은일 및 탈속사상과 결부되어 전개되었다.
이들의 일화는 중국 한대(漢代)의 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지기 시작했으며, 위진남북조시대부터 그려졌다. 바둑을 두는 모습으로는 기록상 당대(唐代)의 손위(孫位)가 그린 「사호혁기도」가 처음이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 남송마원(馬遠)의 「상산사호도」가 가장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의 혼란한 정세를 피해 치악산에 은거한 원천석(元天錫)이 상산 계곡의 소나무 그늘에서 바둑을 두는 장면을 그린 「사호도」를 보고 지은 시를 통해 수용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초에 왕족 화가 이정(李定)이 「사호위기도」를 그렸으나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이경윤(李慶胤)의 전칭작인 「사호위기도」(개인소장)를 비롯하여 조선 중기부터 작품이 전하며, 절파(浙派) 화풍과 남종화풍을 거쳐 조선 말기의 민화풍으로 확산되며 전개되었다.
이 작품들은 주산이 크게 배치된 산수를 배경으로 구성된 대경인물화와, 커다란 소나무를 배경으로 그려진 소경인물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대경적인 구성은 화면 중단에 비스듬히 솟아 오른 주봉과 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는 광경을 절파(浙派) 화풍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경윤의 「사호위기도」와 작가미상의 「상산사호도」(일본 개인소장)와 같은 조선 중기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마원의 그림에서처럼 사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둑판에서 떨어져 있거나 시선을 두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소경적인 구성은 근경에 크게 상하 절단식으로 배치된 소나무에 의해 조성된 공간에서 바둑을 두는 광경을 그린 것으로, 조선 후기의 심사정(沈師正)과 이인문(李寅文)에 의해 남종화풍으로 다루어졌다. 심사정의 「상산사호도」(개인소장)는 붉은 색 영지(靈芝)나 사슴, 차 끓이는 동자 등의 배치를 통해 선계 속의 선인상으로 묘사되는 특징을 보인다. 사호 모두 바둑판에 시선을 두고 있으며, 한 명은 서서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조선 후기 이래 사찰의 벽화에도 그려졌는가 하면, 춘향이 방을 비롯하여 여염가 실내를 장식한 민화로도 확산되어 도식적으로 배열된 산 속에서 산 보다 크게 확대하여 사호의 바둑 장면을 묘사하는 등 내용과 형식을 과장되게 나타내는 특징을 보였다.
조선시대 문사들의 은일 및 탈속사상과 결부되어 위기도의 대표적인 화제로서 전개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여가 풍속도의 제제로 원용되기도 했고, 신선사상과 결합되면서 사찰의 벽화와 여항가의 민화로 다루어지며 시정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