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 ()

고려시대사
유적
고려 후기, 제28대 충혜왕이 묻힌, 북한의 개성특급시에 있는 왕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고려 후기 왕릉
건립 시기
1344년(충혜왕 복위 5)
관련 국가
고려 왕조
관련 인물
충혜왕
소재지
개성특급시
내용 요약

영릉은 북한의 개성특급시에 있는, 고려 후기에 제28대 충혜왕이 묻힌 왕릉이다. 방탕하여 폐위된 충혜왕은 1344년(충혜왕 복위 5) 1월 유배지인 중국 산동성 게양현으로 가던 중 악양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같은 해에 6월 원나라에서 고려로 운구되었고, 그해 8월 능호를 영릉이라 올리고 개성에서 묻혔다. 현재 영릉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아 능제(陵制)나 구조 및 상설은 밝혀진 것이 없다.

정의
고려 후기, 제28대 충혜왕이 묻힌, 북한의 개성특급시에 있는 왕릉.
건립경위

충혜왕(忠惠王)충숙왕(忠肅王)의 제3 왕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를 범하여 기철(奇轍)을 비롯한 이의 상소로 주5 원(元)나라에서 대경(大卿)과 타치[朶赤] 등을 보내어 그를 잡아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12월에 그는 원나라 순제(順帝)에 의해 원의 도읍지인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산동성(山東省)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던 도중 1344년(충혜왕 복위 5) 1월 병자일에 악양현(岳陽縣)에서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6월 계유일에 고려로 그의 시신이 주2. 충목왕(忠穆王)이 그해 8월 경신일에 왕실 법도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능호를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능(陵)에 장사를 지낸 후 그의 신주(神主)는 24개월간 혼전(魂殿)에 존속하였다가 1346년(충목왕 2) 5월 을유일에 주3주1. 충혜왕과 그의 왕비였던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진전사원(眞殿寺院)은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토성리 묵사동 광덕산 아래에 있는 신효사(神孝寺)이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왕릉의 관리를 위해 제릉서(諸陵署)라는 담당 관서에 관원을 두었고, 왕릉은 위숙군(圍宿軍)이 지키게 하였으므로 영릉에도 위숙군을 배치하였다. 이후 조선의 태종(太宗)은 1401년(태종 1)에 고려 태조 현릉(顯陵), 현종(顯宗) 선릉(宣陵), 문종(文宗) 경릉(景陵), 원종(元宗) 소릉(韶陵)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인 개성부(開城府)의 수령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져 대다수 왕릉은 그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으나, 여기에 충혜왕 영릉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순조(純祖)가 1818년(순조 18)에 고려 왕릉의 능주(陵主)와 소재가 확실한 30기에 주6을 세울 때나, 고종(高宗)이 1867년(고종 4)에 고려 왕릉 57기를 조사하고 표석을 세울 때에도 충혜왕의 영릉은 확인되지 않는다.

형태와 특징

영릉은 단지 개성특급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며 능제(陵制)나 주7의 구조 및 시설 등도 파악할 수 없다. 강화도읍기(江華都邑期) 이후에 왕릉이 진전사원 근처에 주8이 되고 있었던 시대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신효사 부근에 충혜왕의 무덤인 영릉이 소재했을 가능성은 주4. 또한 폐위된 국왕의 장례여서 왕릉보다 격을 낮춰 개성 부근에 충혜왕의 무덤을 조성하였다면, 일제강점기에 개성 인근에 소재했다고 조사된 53개 왕족의 무덤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의의 및 평가

영릉은, 고려 국왕 중 유일하게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에서 사망하여 그 시신을 고려로 운구하고 개성에 왕릉을 조성한 사례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단행본

한재렴, 『고려고도징』(아세아문화사, 1973)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논문

권두규, 「고려시대 능호 기재 방식과 수여 기준」(『한국중세고고학』 1, 한국중세고고학회, 2017)
김인호, 「고려시대 국왕의 장례절차와 특징」(『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연구회, 2010)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45, 한국사상사학회, 2013)
허흥식, 「고려의 왕릉과 사원과의 관계」(『고려시대연구』 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 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 『여조왕릉등록』을 중심으로」(『한국중세고고학』 5, 한국중세고고학회, 2019)

기타 자료

『조선고분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16)
주석
주1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

주2

시신을 넣은 관을 운반함. 우리말샘

주3

종묘의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초에는 목조, 익조, 탁조, 환조 등 태조의 사대조(四代祖)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에는 당시 재위하던 왕의 사대조(四代祖)와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9칸으로,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우리나라 국보로, 국보 정식 명칭은 ‘종묘 정전’이다. 우리말샘

주4

아직 그대로 존재함. 우리말샘

주5

왕이나 왕비 등의 자리를 폐함. 우리말샘

주6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 죽은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행적, 묘주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7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무덤 속의 방. 우리말샘

주8

집 따위를 지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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