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일명 박천식(朴天湜)이라고도 한다.
박천식(朴天植)은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 시대 군인으로 입신(立身)하여 1258년(고종 45) 초반에 대정(隊正)에 이르렀다. 1258년(고종 45) 3월 26일(丙子)에 별장(別將) 김준(金俊)과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이 중심이 되어 최씨무인정권을 붕괴시킨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였다. 무오정변은 최의정권(崔竩政權)의 정치·경제적 실정에 불만을 품은 여러 정치세력이 결집되어 제4대 집권자인 최의를 죽이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룩했던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이때 박천식이 맡은 역할은 정변의 주동세력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즉 박천식은 김준과 유경의 모의에 처음부터 가담하였고 신의군(神義軍) 도령낭장(都領郎將) 박희실(朴希實)을 도와 신의군 병력을 결집시키는 임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공을 세운 결과, 같은 해 7월 차송우(車松祐) 등과 더불어 원종공신(原從功臣) 성격의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 同力輔佐功臣)에 책봉되었다.
그해 12월 29일(甲辰) 산원(散員)으로 장군 박희실·조문주(趙文柱) 등과 함께 몽고에 파견되어 최의의 죽음을 알리고 몽고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다음해인 1259년 3월 8일(壬子) 귀국하였으며, 대몽외교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별장으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6월 30일(壬寅) 고종이 승하한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몽고에 다시 파견되었다가 9월 15일(丙辰) 귀국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258년 7월 위사보좌공신 19인(혹은 20인)에 포함되었고, 1260년 6월 위사보좌공신 15인에 다시 책봉되어 포상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