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부터 고향인 광주에 정착한 허백련은 호남 서화계의 후진 양성과 서화 교양의 도량으로 연진회를 개설했다. ‘연진(鍊眞)’은 참됨을 연마한다는 뜻으로 서화를 통한 인격도야를 목적으로 했음을 의미한다. 참다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참된 근원을 보전하며, 예악(禮樂)을 바탕으로 서로 모여 삶을 값지게 보내기 위해 모인 동호회의 성격이 강하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직과 겸손을 중시하며 시서화 삼절이 좋아 즐기기 위해 모인 교유 단체이다.
발기인은 허백련이 중심이 되어 정운면(鄭雲勉)⋅구철우(具哲祐)⋅허행면(許行冕)⋅정상호(鄭相浩)⋅노형규(盧衡奎)⋅노주봉(盧周鳳)⋅최한영(崔漢泳) 등 36명이었다. 김은호, 변관식도 찬조 회원으로 참여했다. 1939년에 제1회 연진회의 회원전이 열렸는데 이것은 회관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허백련과 관계가 깊었던 김은호와 변관식이 찬조 출품하기도 했다. 1940년에 제2회 연진회전이 열렸다.
허백련은 회원들을 일주일에 하루씩 모이게 하여 체본을 그려주거나 써주어 이를 임모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것을 강평해 주며 회관 안에서 전시도 하고,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발견해서 고쳐 나가도록 했다. 이러한 그의 교육은 곧 많은 회원들을 불러 모아 연진회는 서화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허백련의 지도 아래에 정운면, 허행면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김정현(金正炫), 조복순(趙福淳) 같은 뛰어난 신진 화가를 배출했다. 또한 허백련의 체본을 갖고자 하는 지역 유지들도 모여 들면서 연진회관은 교유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도 주목된다.
광주 지역에 남종화를 부흥시키며, 현대 화단에까지 전통의 맥을 이어 나가는데 기여했다. 1944년경에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