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무대장치를 독습해 온 이후 프로미술운동에 가담하여 무대미술을 비롯한 연극운동을 주도한 예술인의 한사람이다. 1930년에 문인이자 화가인 이갑기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연극 단체인 가두극장(街頭劇場)을 만들어 연극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1934년에 박진명과 함께 조형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하 프로예맹 약칭)의 활동을 이끌었다.
대구 출신으로 대구상업고등학교를 낙제하여 1927년에 퇴학을 당한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무대미술 관련 공부를 했다. 1년 뒤인 1930년에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문예 운동에 뛰어들었고, 연극과 미술 분야를 아우르며 일련의 프로예맹 운동을 주도했다. 당국의 제지 속에서 활동하다가 제2차 프로예맹 검거 때 투옥당한 뒤 1937년에 극심한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28년에 이갑기와 더불어 1920년대와 1930년대 대구지역 서양화단을 이끌었던 영과회 전람회에 프로미술 계열의 작품을 낸 적이 있으며, 1929년에 도쿄로 건너가 1년 동안 무대장치 관련 독학을 하다가 1930년 귀국해 다시 이갑기와 함께 가두극장 미술부원으로 활약했다. 이 무렵 상경하여 1931년프로예맹 연극부 대표를 맡은 이후 1932년프로예맹 연극부 대표, 1934년연극동맹 대표를 맡으며 연극 활동에 헌신했다. 또한 1932년에는 강호, 신고송 등과 극단 ‘신건설’에 참여하여 무대장치 제작활동을 겸했다.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에 일제 당국으로부터 세 번에 걸쳐 검거당했는데, 1932년에는 ‘영화의 벗’, 1933년에는 ‘연극운동’ 잡지 발간 준비 중에 피검당했으며, 얼마 뒤 풀려나와 1934년 박진명과 함께 조형미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상춘 작품의 특징은 민중을 소재로 하여 인물이 처한 사건과 상황의 주제성을 명확히 제시하는 등 조국의 식민지 운명을 비판적 현실주의의 관점으로 구현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음각기법(陰刻技法)을 대담하게 적용한 판화 등에서 예리한 관찰력, 인물의 형상 및 심리의 탁월한 표현력, 생동하는 현장감을 보여준다.
이상춘의 대표작품은 1932년에 제작한 두 점의 판화 「질소비료공장」 1, 2 연작으로, 공장 안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다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