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상고기에 대신이 모여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던 정청의 기능을 하였다. 이와 대비되는 것으로써 남당(南堂), 평의전(平議殿) 등이 있다.
초기국가 단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여러 정치세력이 연합하여 주요한 공동 사항을 합의하여 결정하는 논의 구조인 회의체가 존재하였다. 회의체에는 집단별로 유력자들이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회의에서 정사가 논의되고 집행되는 기능을 한 장소이자 기구가 곧 정사당(政事堂)이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138년(일성이사금 5)에 왕성인 금성(金城) 안에 정사당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와 별도로 249년(첨해이사금 3)에 궁궐 남쪽에 남당(都堂이라고도 함)을 짓고, 251년부터는 이곳에서 정사를 집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두고 군신회의(群臣會議)를 개최한 장소가 궁실에서 정사당으로, 정사당에서 남당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회의체 자체를 남당회의와 정사당회의로 구분하여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기구의 관계는 뚜렷하지가 않아 논란이 많다.
명칭상으로 보아 남당은 정무를 집행하는 행정적 성격의 기구이며, 정사당은 그를 논의하는 회의체적 성격을 지닌 기구이자 건물로 보인다. 다만 중고기(中古期)에 이르러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자 정사당이 지닌 회의체적 기능은 점차 쇠퇴하여 정무를 논의하는 건물로서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9세기 초 헌덕왕 때에 이르러 왕의 동생인 각간(角干) 김충공(金忠恭)이 최고 실력자가 되어 정사당에 자리하여 내·외관(內外官)의 인사문제를 처리하였다는 기록은 그를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