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관제묘 ( )

강화 관제묘 정측면
강화 관제묘 정측면
민간신앙
유적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후기 촉나라 장수 관우를 모신 신당. 묘당.
이칭
이칭
관제묘(關帝廟), 관우묘(關羽廟), 관묘(關廟), 관왕묘(關王廟), 관운묘(關雲廟)
내용 요약

강화 관제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후기 촉나라 장수 관우를 모신 신당이다. 관제묘, 관우묘, 관묘, 관왕묘, 관운묘라고도 한다. 동일 지역에 여러 개의 관성묘가 있을 경우 동서남북 방위명을 붙여 동관묘 또는 남관묘라고 부른다. 강화에는 원래 동쪽의 동관제묘를 비롯하여 북쪽과 남쪽에도 각각 북관운묘와 남관운묘가 세워졌다. 이들 중에서 아직까지 옛 형태가 남아있는 곳은 동관제묘이다. 동관제묘는 강화 남산 줄기의 동쪽에 세워졌다. 현재 5개동으로 본채(전래), 칠성각, 요사채 두 개 그리고 정문 등이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후기 촉나라 장수 관우를 모신 신당. 묘당.
개설

관왕묘(關王廟), 관성묘(關聖廟), 관우묘(關羽廟), 관운묘(關雲廟), 관묘(關廟) 등의 이칭이 있으며, 동일 지역에 여러 개의 관성묘가 있을 경우 동서남북 방위명을 붙여 동관묘 또는 남관묘라고 부른다.

역사적 변천

주신(主神)인 관우(關羽, ?~219)는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제(關帝), 관운장(關雲長, 關雲將), 관왕(關王), 성제(聖帝) 등으로 호칭되는 역사적 실존인물로써 자(字)는 운장(雲長)이고 시호(諡號)는 충의후(忠義侯)이다. 장비(張飛)와 더불어 유비(劉備)와 의형제를 맺고 유비의 무장(武將)으로 활약하였으며, 오나라와 싸우다 여몽(呂蒙)에게 패하고 죽었다.

관우를 신격화하여 신앙하는 종교적 행위를 관제신앙(關帝信仰)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견된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전래되었다. 당시, 관우 혼령이 아군을 돕고 명나라군이 왜군을 격퇴시킨 공로는 관제의 음우(陰佑)에 의한 것이라 하여 각 도처에 관성묘를 짓고 국가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후에 재신(財神)으로도 섬겨지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년) 처음으로 한양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고, 이듬해인 1599년에는 동대문밖 동관왕묘가 착공되어 3년 만에 준공 되었다. 이어 강진, 안동, 성주, 남원, 강화 등지에서도 관왕묘가 설립되었다.

내용

강화에 세워진 동관제묘(東關帝廟)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화에는 원래 동쪽의 동관제묘를 비롯하여 북쪽과 남쪽에도 각각 북관운묘와 남관운묘가 세워졌다. 이들 중에서 아직까지 옛 형태로 남아있는 곳은 동관제묘이다. 특이한 것은 동일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세 개의 묘가 조성되었지만, 동쪽은 관제묘(關帝廟)라고 칭하고, 북쪽과 남쪽은 관운묘(關雲廟)로 칭한다.

동관제묘는 강화 남산 줄기의 동쪽에 세워졌는데, 남쪽의 남관운묘와 거리상 가까운 위치에 있다. 1983년부터 보수 또는 증축하여 현재 5개동으로 되어 있는데, 본채(전래), 칠성각, 요사채 두 개 그리고 정문 등이다.

① 본채(전래)

동관제묘에서는 본채를 전래라 부른다. 북관운묘 관리자 김윤화 무녀에 의하면, 동관제묘 본채(전래)는 전 관리인 정방옥씨가 새로 지어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전래는 목조 기와로 되어 있으며 중앙에 4개씩 짝을 이룬 문짝 총 12개가 달려있다.

전래 전각 앞 중앙에는 가로로 쓴 ‘충성전(忠聖殿)’ 현판이 걸려있다. 전래 내부 왼편 벽면에 빨강 비단에 한자로 쓴 ‘옥황임(玉皇任)’ 족자를 모셨다. 옥황님 오른쪽으로 남산후토신령(강화 남산), 장장군, 장선장군을 모셨고, 왼쪽으로 나씨부인, 랑씨부인, 김씨부인, 이씨부인, 조왕님, 용장군, 권씨할머니(과거 전래), 단군할아버지를 모셨다.

전래 중앙 벽면에는 성제님을 모셨고 오른쪽으로 와룡선생, 관장군님, 주장군님 왼쪽으로는 최영장군, 임장군, 마장군을 모셨다. 그리고 정문에는 백마장군과 용마장군을 모시고 있다. 모든 그림의 오른쪽 하단 부분에 이름을 한글로 써두었는데 훗날에 표기된 것이다.

전래 내부의 앞면 안쪽으로 신도들 이름을 쓴 유리 액자들이 걸려 있다. 전래 내부에는 일산, 신도들의 명다래, 북, 종, 삼지창, 청룡도, 제기, 촛대, 향그릇, 채미통, 채미책, 서적 등이 놓여 있다.

② 칠성각

칠성각에는 운원각(雲源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안에 칠성님을 모셔 놓고 있으며 소유자 정정애 무녀 신당도 함께 꾸며져 있다. 그리고 정정애 무녀 신어머니, 강창길(전 외포리 곶창굿 전승자, 정정애 무녀의 사촌오빠) 박수, 전 관리인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원래는 칠성각이 없었는데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초하루와 보름에 찾아오는 신도들을 위해 녹음기로 불경을 틀어 놓는다.

③ 요사채

요사채는 원래 하나였는데, 새로 한 채를 지어 두 채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동관제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례 및 정정애 무녀가 행하는 무속의례 음식을 장만한다.

④ 정문

정문은 동쪽으로 나 있으며 세 칸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다. 정문 바깥쪽 중앙에는 동헌랑묘(東軒廊廟)라고 쓰여 있다. 대문 안쪽 양 벽면에 말을 탄 장수 그림이 걸려 있는데, 이곳 묘를 지키는 문신(門神) 들이다. 흰말을 탄 왼쪽은 백마장군이며, 검정말을 탄 오른쪽은 용마장군이다.

특징

동관제묘의 총 면적은 148여 평(489㎡)이며 국유지로 되어 있는 하천 부지가 약간 들어와 있다. 등기상 건축물은 목조와즙 불당 32.56㎡ 그리고 부속 건물로 목조기와 지붕 단층 불당 18.13㎡, 또 다른 부속 건물로 목조 시멘트 지붕 단층 주택 43. 68㎡이 있다.

현재의 남관제묘 부동산 일체와 운영권은 법적으로 정정애 소유 및 권한으로 되어 있으며, 운영은 신도들 권한으로 행해졌었는데, 80년대 이후 여러 사람 소유로 이전되는 과정 속에서 현재와 같이 개인 소유로 바뀌게 된 것이다.

동관제묘 제의는 옥황님, 성제님 그리고 칠성님 앞에서 지내는데, ‘상청친다’라고 말한다. 상청이 끝나면 뒷전 형식의 하청을 치는데, 이것은 모든 제의를 마치고 끝맺음을 하는 것이다.

정월에는 첨사를 내리고 홍수막이를 해 준다. 신도들은 이곳에 올 때, 쌀, 초, 술 그리고 약간의 돈을 가져온다. 집안에 따라서는 많은 양의 제물을 가져오기도 한다. 제의때 신도들이 가져온 쌀로 밥을 지어 올린다. 축원은 신도 가족들의 성명과 생년월일을 가지고 하며 신도들에게 신장기를 뽑게 하고 공수를 준다.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아침 일찍 진지를 올리고 오전 9시 전에 모든 행사를 끝낸다. 초하루나 보름이 일요일 경우에는 신도들이 많은 가족들을 데리고 온다.

초하루 보름 공양 때의 제의 절차는 먼저 상청을 치고 마지막에 하청을 친다. 상청 순서는 옥황님전 축원-성제님전 축원-청룡도 사슬세우기-칠성각전 축원이며 끝부분에 하청(뒷전)을 친다.

참고문헌

『관성제군성적도지(關聖帝君聖蹟圖誌)』
「성제묘」(장장식, 『한국민속신앙사전-마을신앙』, 국립민속박물관, 2011)
「관우신앙과 관제묘: 강화의 관제묘」(양종승, 인하대학교박물관 학술회의 자료집, 2003)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양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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