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고수제도 ()

국악
개념
조선후기 군영에 소속되어 군사훈련에서의 지휘 · 통신 및 각종 행진과 연향에서의 연주 등을 담당한 표하군 소속의 취타악대.
정의
조선후기 군영에 소속되어 군사훈련에서의 지휘 · 통신 및 각종 행진과 연향에서의 연주 등을 담당한 표하군 소속의 취타악대.
개설

취고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나라로부터 그 제도를 수용하여 성립된 군영악대의 하나로, 그 성립 시기는 1593년 이후, 1600년 이전이다. 취고수는 훈련에서 지휘·통신의 기능을 담당하고, 행군과 행진 및 각종 연향에 참여하여 음악을 연주했으며, 각처 입직에 참여하였다. 취고수가 연주한 취타악기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달랐으나, 대각(大角)·나각(螺角)·나발(喇叭)·호적(號笛·胡笛)·바라(哱囉)·솔발(摔鈸)·자바라(啫哱囉)·점자(點子)·금(金)·정(鉦)·나(鑼)·고(鼓) 등 12종류이다. 취고수의 규모는 군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100여명 정도였다.

연원 및 변천

취고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16세기 말에 성립된 군영악대 제도로 그 기능은 군영의 지휘·통신과 연주 등이었다. 취고수 제도는 우리나라 고대로부터 전승되는 군영의 지휘·통신 체제 위에 조선후기에 도입된 명나라의 취고수 제도가 더해져 성립된 제도이다.

삼국시대는 고(鼓)·각(角) 중심의 군영의 지휘·통신 체제, 고려시대는 취각군·취라군·고각군 체제, 조선전기에는 각(角:대각·중각·소각)·나(螺)·나발·대평소(태평소)·탁(鐸)·금(金)·정(鉦)·고(鼓)·비(鞞) 등의 악기를 사용하는 형명제도와 지휘·통신 체제가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練兵實記)』의 군사훈련 내용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취고수 제도도 함께 수용함으로써 취고수 제도가 성립되었다. 취고수 제도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었다.

17세기는 임진왜란 후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악기와 우리나라 전래의 악기를 모두 사용한 시기이다. 18세기에는 취타악대를 가진 집단이 표하군·취수·취고수의 세 종류이고, 취타수라는 악대명을 주로 사용하였다. 18세기는 17세기에 비해 취타악대의 조직과 악기편성이 구체적이어서 어느 정도 정착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취고수 제도가 법제화되고 취타악기 편성이 완전히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취고수는 표하군의 하위조직으로, 취타악대뿐 아니라 다른 종류의 군총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형태이며 조직의 규모와 구성 등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20세기 초 군영이 철폐됨으로써 취고수는 군영악대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 군영제도의 소멸과 함께 취고수 제도도 함께 없어지고, 그 연주전통은 취타내취를 통하여 궁중으로 이어졌다. 조선후기 군영의 취고수 음악은 궁중으로 전승됨으로 인해 그 성격이 궁중음악으로 변하였고, 취타악기는 일곱 종류로 줄어들었으며, 궁중악기 중 군악기로 분류되었다.

내용

취고수는 훈련에서 지휘·통신의 기능을 담당하고, 행군과 행진 및 연향에 참여하여 음악을 연주하며, 각처 입직(入直)에 참여하였다. 취타악대의 본래적 기능은 지휘·통신에 있지만, 조선후기 취고수는 지휘통신 외에 연향과 행진에서의 연주 등 다양한 활동을 하여 음악적 기능이 컸다.

취고수의 취타악기 편성은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대각·나각·나발·호적·바라·솔발·자바라·점자·금·정·나·고 등인데, 이 중 훈련의 지휘·통신에 사용한 취타악기는 대각·나각·나발·호적·바라·정·나·솔발·북의 아홉 종류이다. 점자·자바라는 지휘·통신에는 사용하지 않고 행진에서만 사용했고, 금(金)과 정(鉦)은 명칭이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악기로 취급되었다. 조선후기 취고수 악대의 악기편성은 고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악기와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것이 혼합되어 독자적 체계를 이룬 것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취고수의 복식은 전립에 흑삼승갑협수(黑三升甲挾袖)·목면(木棉) 황호의(黃號衣)·흑수화자(黑水靴子)를 착용하고 칼을 차고 군악의 각종 악기를 가지며, 중국사절이 올 때 취타수는 삼승단협수(三升單挾袖)·홍삼승단괘자(紅三升單掛子)·홍면주전대(紅綿紬戰帶)·홍전립(紅戰笠)·흑수화자(黑水靴子)를 착용하고, 나발·자바라·호적·나(鑼)·고(鼓)·솔발을 연주한다고 했다.

현황

조선후기 취고수가 연주하던 취타악기 중 대각·바라·솔발·점자·나(鑼) 등의 악기는 현재 전승이 단절되었고, 나발·나각·태평소·자바라·징·북의 여섯 종류만 전승되고 있다. 대각과 바라는 나발로 흡수되었고, 점자는 운라로 대체하여 사용하며, 금(金)·정(鉦)·나(鑼)는 징으로 통합되어 사용하고 있다. 솔발은 그 전승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취고수 제도가 철폐되자 취고수 음악은 궁중, 민간, 불교, 농악의 네 방면으로 전승되었다. 취고수 음악이 궁중으로 전승된 것은 취타내취가 장악원으로 이속된 것이 계기였다. 궁중으로 전승된 대취타(무령지곡)는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외에도 메나리조·능게휘모리·능게자진모리·취타굿거리·능게굿거리·취타염불을 대취타 편성으로 연주한다. 취고수 음악은 민간의 전문연주가들에게도 전승되었는데, 그 악곡은 대취타·취타염불·취타굿거리·취타염불·능게굿거리·능게자진모리·능게 휘모리이다. 또 한편으로 농악으로도 이전되었는데, 악기편성 면에서 취고수 악대와 농악의 편성은 성격이 동일하다. 불교의식에도 취타악기 편성으로 음악을 연주하는데, 불교음악과 군영음악은 고대부터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조선후기 불교 취타악은 전래의 불교 취타악의 바탕에 군영 취타악이 불교 음악에 습합됨으로써 새로운 성격의 불교 취타악이 형성되었고, 현재 영산재 등 의식에서 연주하는 악곡은 취타가락·능게가락·내림게가락·염불가락·천수바라가락·요잡가락(막바라 반주) 등이다.

조선후기 취고수의 음악인 취타악은 호적 중심의 악곡으로 성격이 변하여 그 영역이 확대되어 전승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후기 취고수 제도의 의의는 새로운 형태의 악대 제도, 악기와 악기편성, 악곡, 인접 음악문화에 미친 영향력, 기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취고수 제도는 새로운 형식의 악대제도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선전기까지 군영에서 취타악기를 사용하였고 초기형태의 악대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악대로까지 발전하지 못하였고, 조선후기에 비로소 악대의 체제를 갖춤으로써 조선후기 새로운 음악문화를 형성하였다.

둘째, 취고수 제도의 성립으로 인해 새로운 취타악기가 도입되고 기존 취타악기의 사용이 활성화된 점이다. 그 이전까지 취타악기를 사용하였지만, 대부분 지휘 통신의 기능에 머물렀던 반면 조선후기에는 연주의 기능까지 갖추게 되었고, 새로운 악기를 도입함으로써 음악문화를 다양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조선후기 취고수가 연주한 취타악기는 고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악기와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것이 혼합되어 독자적 취타악대 체계를 이룬 것이다. 취고수의 악기편성은 관악기와 타악기의 비교적 단순한 구성이지만, 이 중에는 나각·대각과 같은 고대로부터 전승되는 악기도 포함되어 있어 악기사적 측면에서 의미가 있으며, 솔발·점자와 같은 특수한 악기가 포함되어 조선후기 음악문화의 영역을 넓혔다는데 의미가 있다.

셋째, 취고수 악대의 형성으로 취타악이라는 군영음악문화가 생성되었고, 고취 외에 새로운 행악 연주제도가 생겨났다.

넷째, 취고수 음악은 그 자체 새로운 음악문화로써 가치가 있고, 더 나아가 인접 음악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확대재생산되어 조선후기 음악문화의 창출에 기여한데 음악사적 의의가 있다.

다섯째, 취고수 악대제도는 20세기 이후 단절되었지만, 그 음악은 ‘호적 중심의 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함으로써, 새로운 음악문화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새로운 음악의 발생에 따른 새로운 연주 복식·음악 용어의 생성 등 조선후기 새로운 음악문화를 창출하였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군영악대 취고수·세악수·내취』(이숙희, 태학사, 2007)
「조선후기 지방군영 취타악대 연구」(이숙희, 『한국음악연구』, 2006)
「불교취타악의 형성 배경」(이숙희, 『한국음악연구』, 2006)
「작법무의 변천과 조선후기 군영 취타악과의 관계-감로탱을 중심으로」(이숙희, 한국전통음악학보』, 2005)
집필자
이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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