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산군 이탁 백자 음각 묘지 ( )

공예
유물
문화재
조선시대 종친 윤산군 이탁의 묘에서 출토된 묘지(墓誌).
정의
조선시대 종친 윤산군 이탁의 묘에서 출토된 묘지(墓誌).
개설

종친(宗親) 윤산군(輪山君) 이탁(李濯, 1462~1547)은 세종(世宗)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 1420~1469)의 여덟째 아들로, 자(字)는 자광(子光)이다. 그의 묘역은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7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탁의 묘지는 서울특별시가 2010년에 실시한 ‘명문이 있는 백자’ 일괄 공모를 통해 발굴된 이후, 화정 박물관(종로구 평창동 소재)에서 소장하고 있다. 2011년 1월 13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내용

묘지는 모두 3점으로 직사각형 순백자이고 앞뒷면 모두 유약이 입혀져 있다. 음각으로 묘지명(墓誌銘)을 새겨 넣었고 글씨는 소자(小字)의 해서체(楷書體)로 썼다. 뒷면에는 ‘일(一)’, ‘이(二)’, ‘삼(三)’의 숫자를 음각으로 새겨 묘지의 순서를 표시하였다. 묘지명은 입암(立巖) 민제인(閔齊仁, 1439~1549)이 윤산군 이탁이 세상을 떠난 1547년(명종 2) 4월에 지은 것으로,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윤산군 이탁의 이력과 성품, 가족 관계, 장례 등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윤산군 이탁은 7살이 되던 1468년(세조 14)에 보신대부(保信大夫)의 품계를 받아 윤산부정(輪山副正)이 되었다. 이후 1476년(성종 7)에 창선대부(彰善大夫), 1499년(연산군 5)에 명선대부(明善大夫), 1541년(중종 36)에 정의대부(正義大夫)와 윤산군에 봉해졌으며, 1543년(중중 38)에는 중의대부(中義大夫)에 올랐다. 또한 중중반정 후에는 신수근(愼守勤)과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8월에 풀려나기도 하였다.

윤산군 이탁은 평소 조용한 성품으로 술을 즐기지 않았고, 꽃을 좋아하는 반면 활쏘기에 능한 면모를 지녔다. 부사정(副司正) 신석녕(申錫寧)의 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고, 측실에서 다섯 아들을 두어 모두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다. 1547년(명종 2) 정월 19일 86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고, 광주(廣州) 정도(正道) 의곡리(義谷里)에 묻혔다.

의의와 평가

이 묘지는 지금까지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전하던 윤산군 이탁에 대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고, 세종의 손자이자 조선 전기 왕실 인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 또한 크다. 아울러 도자기로 된 묘지로서, 현전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묘지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참고문헌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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