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해방 이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카페 오 고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을 발표한 예술가이다. 비디오예술가, 작곡가, 행위예술가, 조각가, 설치미술가이기도 하다. 1962년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1963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비디오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1965년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해 ‘카페 오 고고’에서 공개 방영했는데, 이는 미술사에서 공식적인 비디오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1952년 도쿄대학교 문과부 미학미술사학과에 입학하여, 1956년에 졸업하였다. 도쿄대학교에 재학 당시 음악과 철학에 심취했으며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Arnold Schönberg 硏究 )』였다.
1957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학교 및 쾰른대학교 등에서 서양 건축과 작곡을 공부하였고, 1958년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전학해 공부하였다. 이 때 다름슈타트 여름음악 캠프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큰 영감을 얻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1962년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이 되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1960년대 초 독일의 언론으로부터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라는 개인 작품전을 열어 13대의 실험 TV를 동원해 소리의 시각화를 예술작품으로 보여줘 비디오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1965년 소니의 포타팩(Portapak,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Cafe au Go Go)에서 공개 방영했는데, 이것이 미술사에서 공식적인 비디오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과 함께 비디오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치며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비디오아트의 설치 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해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비디오아트와 자연물을 음악적으로 혼합한 테크놀로지적인 작품을 선보여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의 퍼포먼스는 뉴욕과 프랑스의 방송국,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영되어 전세계 2천 5백만명이 시청하였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서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한 ‘칭기스칸의 복권’, ‘스키타이의 왕 단군’, ‘고대기마인물상’ 등과 같은 작품들을 다수 내놓았다.
1996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나, 이를 극복하고 예술가로서의 창의성을 발휘해 2000년 뉴밀레니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선보여 레이저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선불교, 샤마니즘, 주역, 도교 등 아시아의 종교적 요소가 용해되어 있으며 종교를 통한 깨달음을 자신의 예술에 반영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며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1993년 제45회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1995년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1996년 제5회 호암상 예술부문, 1999년 미국 마이애미예술가상, 1999년 일본 교토프라이즈, 2000년 금관문화훈장, 2001년 제8회 빌헬름 렘브루크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로 별세하였고, 유해가 서울 · 뉴욕 ·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