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수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미국으로 노동 이민하여 공립협회, 대한신민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노동으로 번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실업가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6년(고종 13) 10월 21일
사망 연도
1956년 11월 23일
출생지
서울
정의
일제강점기 때, 미국으로 노동 이민하여 공립협회, 대한신민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노동으로 번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실업가 · 독립운동가.
개설

공립협회∙한인비행가양성사∙대한인국민회∙흥사단 등에서 활동하며 많은 의연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해방 직후에는 『독립』지를 통해 친공적 성향의 활동을 한 인물이다.

생애

1876년 10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하고 강화도 서면에서 살았다. 1903년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로 왔다. 하와이농장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1904년경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프레스노와 솔트레이크,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한인노동주선 업무를 하였고 이후 캘리포니아의 스탁톤, 멕스웰, 네바다주의 로간 등지에서 과일 및 쌀 농사를 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각종 의연금을 아끼지 않았고 한인교육과 국내 동포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의연금을 내며 도왔다.

활동사항

1905년 4월 안창호가 공립협회를 설립할 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 해 11월 14일에 마련된 공립회관에서 총부 송석준, 사무 방화중과 함께 간사로서 공립회관을 운영하였다. 1906년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의 경찰원에 임명되었고, 1907년에는 응접위원이 되었다.

솔트레이크에서 방건초가 운영하던 여관과 노동주선 업무를 박영순과 함께 인수받아 일하면서 공립협회 솔트레이크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월 안창호가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조직을 위해 귀국하기 직전, 안창호∙이강∙임준기∙신달윤∙방영순 등 공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대한신민회 발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대한신민회취지서」, 「대한신민회의 구성」, 「대한신민회통용장정」을 작성하는데 동참하였다.

1908년 3월 장인환의 스티븐스처단의거로 일어난 재판비용을 돕기 위해 유타주의 철도노동자들과 합심해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였으며, 식산흥업을 통한 국권회복을 위해 1908년 10월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 본부를 해삼위(海蔘威 :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기로 계획하며 추진할 때 31명의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흥사단에 정식 가입하였다.

1920년 2월 윌로스에서 노백린과 김종림∙신광희 등과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다. 그 해 7월 이를 돕기 위해 한인비행가양성사(총재 김종림)가 조직될 때 신광희와 함께 재무가 되어 비행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또한 각종 노동이나 농장 운영 등을 통해 번 수입 중 일정 부분을 항상 의연금 명목으로 지원하며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1920년 4월 29일 상하이의 한인 청년들이 조직한 모험구국단에서 폭발물을 제조하다 실수로 폭발해 프랑스조계의 프랑스 경찰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재수는 송종익∙임준기과 함께 1만 달러의 거금을 안창호에게 보내 이를 무마시켜 주었다. 또한 한인비행가양성소의 감독으로 있던 곽림대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최윤호와 함께 캔터키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학을 공부할 때 김종림과 함께 학비를 지원해 주었다. 그 외도 임시정부 후원금과 독립금, 재난 당한 국내 동포를 위한 구제 의연금, 멕시코 동포 구제금, 스탁톤의 한인학교를 위한 기부금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곤경에 처한 한인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1943년 민족혁명당북미총지부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진보적 언론인 『독립』을 적극 후원하면서 이재수는 사상적인 변화를 보이며 친공적 성향의 인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지에 대한 단순한 재정 후원에만 그치지 않고 해방 직후부터 직접 글을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글들의 논조는 주로 반이승만의 입장에 서서 친공적인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상훈과 추모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공립신보』
『신한민보』
『노백린의 생애와 독립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독립기념관, 2003)
『미주한인사회와 독립운동 1』(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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