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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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학
인물
해방 이후 『우주변화의 원리』, 『동의수세보원주석』 등을 저술한 학자. 한의학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사망 연도
1968년
본관
청주
출생지
함경남도 함주
내용 요약

한동석은 해방 이후 『우주변화의 원리』, 『동의수세보원주석』 등을 저술한 학자로 한의학자이다. 이제마의 이전(二傳) 제자인 김홍제에게 부인의 병을 치료받은 것을 계기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의학에 입문한 후 2년여 만에 사람들의 질병을 서슴없이 고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남 해 부산에 정착하여 한의원을 개원하였다. 1966년에 우주운동의 법칙이 되는 음양오행에 대한 이치를 밝힌 『우주변화의 원리』를 발행했다. 1967년에는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해설서인 『동의수세보원주석』을 발행하였다.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우주변화의 원리』, 『동의수세보원주석』 등을 저술한 학자. 한의학자.
개설

한동석(韓東錫)은 1911년 음력 6월 5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에서 청주한씨 예례빈윤공파 23세손으로 한희춘(韓希春)과 이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국흠(國欽)이고, 호는 두암(斗庵) · 동암(東庵)이다. 월남 후에 동석(東錫)으로 개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한동석은 소년시절에는 종형제들과 함주군 오로리(현 함경남도 영광군)에 있는 오로리소학교를 다녔고 후에 영생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였다. 집안의 장손으로 13세에 정혼을 했으나 몇 년 후에 헤어졌다. 20대 후반에 다시 함흥으로 가서 장사를 하였고, 어느 정도 재력을 쌓아 집안을 돌보기도 하였다. 두 번째 부인이 폐병을 앓았는데, 동무 이제마의 이전제자(二傳弟子) 중 김홍제에게 부인의 병을 치료받았다. 김홍제가 부인의 병을 치료하면서 “지금은 이렇게 고쳤으나 나중에 재발하면 못 고친다.”고 하였는데 결국 병이 재발하여 사망하게 되자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것을 인연으로 김홍제 밑에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한동석은 입문 이후 한의학에 매달려 공부를 시작한지 2년여 만에 주변 사람들의 질병을 서슴없이 고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한 후에 부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이와 동업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부산 영도에서 진료를 하면서 부산에 있던 동양의학전문학원에서 강사로 출강하기도 하였다. 1953년 제2회 한의사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하고, 정식으로 부산에서 인계한의원(仁溪漢醫院)을 개원하였다.

1953년에 『역학원론(易學原論)』의 저자인 한장경(韓長庚)에게 2개월 동안 『주역』을 배웠다. 또한 1956년에 서울로 이사한 후 인사동 사거리에 한동석한의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계룡산 국사봉을 출입하면서 『주역』과 『정역』 등을 공부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에 나오는 『정역』에 대한 이해는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1960년 전후로 『내경(內經)』, 『유경(類經)』, 『주역』, 『본초(本草)』 등을 한의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한의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동아 · 조선일보 등의 일간지에 한방 관련 기사를 투고하면서 양방의사들과 논쟁을 벌이는 글도 싣기도 했다.

1960년에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1966년에 『우주변화의 원리』를, 이듬해에는 『동의수세보원주석(東醫壽世保元註釋)』을 발행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는 부제가 음양오행 원리로서, 우주운동의 법칙이 되는 음양오행에 대한 이치를 밝히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특징은 우주본체의 근본인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 등 삼극(三極)을 한꺼번에 언급하면서 그들을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서양철학의 우주관과 그 한계성을 비판하였고 이제마 선생의 오행관인 오행의 질량변화 개념을 소개하였다. 또 토화작용, 금화교역의 원리를 명쾌하게 밝혀 놓았으며, 『정역』과 김일부 선생의 오행관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은 미래의 우주관까지 제시하고 있다.

『동의수세보원주석』은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해설서로써 모든 질병의 변화는 체질의 특성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한 동무의 원리를 분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처방에 대한 입방원리를 밝혀 놓음으로써 누구든지 동무의 입방원리와 인간생리의 특수성을 알고 처방을 운용할 수 있게 하였다.

원래 북한에 있을 때 잠시 기독교인으로 생활한 적이 있었으나 월남 후에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임종이 임박했을 때에 아내와 제자들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루까라는 세레명을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1968년 음력 6월 5일 새벽에 가족과 제자들의 곁에서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방학동 소재의 도봉산 밑 방학동 천주교묘지에 위치해 있다.

참고문헌

「한동석의 생애에 관한 연구」(권경인, 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집필자
권건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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