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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金殷鎬)가 1920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 그린 부벽화(付壁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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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김은호(金殷鎬)가 1920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 그린 부벽화(付壁畵).
내용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97㎝, 가로 579㎝. 「백학도(白鶴圖)」는 김은호가 28세에 그린 것으로 창덕궁 대조전 내의 서벽 상단(상인방에 해당함)에 장식되었다. 마주보는 동벽에는 오일영(吳一英)과 이용우(李用雨)가 합작하여 그린 「봉황도(鳳凰圖)」가 있다. 화단에 입문한 초기부터 어진 화가로 발탁되어 이미 주목을 받아 왔던 김은호가 창덕궁 벽화 사업에서 단독으로 한 벽의 장식을 맡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김은호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 독립신문을 배포한 일로 잡혀가 옥고를 치룬 후 석방되어 요양 중에 있었다. 그는 윤덕영(尹德榮)이 자신에게 창덕궁 벽화 제작을 의뢰했다고 말한 바 있다. 함께 참여했던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오일영, 이용우는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서 작업했고, 김은호는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취운정(翠雲亭)에서 「백학도」를 그렸다고 전한다.

「백학도」는 가로 579㎝의 적지 않은 크기의 대작이었지만 1920년 8월 초에 착수하여 9월 말에 완성했고 다른 화가들도 비슷하게 완성했다고 하니 모든 참여 화가들이 한마음으로 이 작업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규모의 희정당(熙政堂) 벽화를 2폭이나 맡았던 김규진(金圭鎭)도 같은 시기에 완성했다.

창덕궁의 벽화 제작은 당초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총무였던 김응원(金應元)에게 의뢰하였으며, 강필주(姜弼周), 김은호, 고희동,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이용우가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 4명뿐이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 3,000원이 넘는 넉넉한 그림값을 주었는데 이것을 분배하면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당시 신문은 전하고 있다.

이 벽화 제작에 참여한 화가들은 김규진을 제외하면 모두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이상범, 노수현, 오일영은 김은호보다 어린 20대 초반이었고 이용우는 20살이 아직 되지 않은 19살이었으므로, 황실이 주도가 된 사업에 아직 작가적 완성기에 접어들지 않았던 화가들이 참여했던 사실은 주목된다. 그들의 스승이었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의 사후에 중간 세대였던 이도영이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곧바로 20대의 젊은 신진 화가들에게 화단의 중심이 옮겨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화미술회의 스승이었던 김응원은 묵란도를 주로 그렸으므로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던 듯하며, 강필주는 김응원과의 불화로 인해 참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이 있는 생활공간으로, 1917년 화재 후 재건할 때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와 지었다. 이때 대조전은 희정당과 경훈각과 서로 이어지도록 복도와 행각을 연결시켜 재건되었다. 이 세 건물에는 모두 6점의 벽화가 장식되었는데, 대조전 동벽에는 오일영과 이용우가 「봉황도」를, 희정당에는 김규진이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동벽)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서벽)를, 경훈각(景薰閣)에는 노수현이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동벽)와 이상범이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서벽)를 각각 제작했다.

동벽의 「봉황도」와 서벽의 「백학도」에는 각각 해와 달이 그려져 있으며 이를 좌우로 나란히 배치하면 마치 하나의 연폭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양의 이치를 보여줄 뿐 아니라 경물을 배치하고, 채색을 하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두 작품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경훈각 벽화도 마찬가지다. 화가들은 건물의 사용 용도와 소재의 선택, 제작 기법에까지 동서벽을 한 쌍으로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궁궐을 장식한 벽화」(강민기, 『조선 궁궐의 그림』, 돌베개, 2012)
「1920년 창덕궁 벽화 조성에 대한 연구」(조은정, 『미술사학』33, 미술사학연구회, 2009)
「궁궐 전각의 장식그림 : 창호그림과 부벽화」(박윤희, 『궁궐의 장식그림』, 국립고궁박물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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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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