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춘대유희의 프로그램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소춘대유희가 공연된 협률사(協律社)는 원래 고종의 칭경예식을 위해 기생, 재인, 광대 등을 모아 연습시켰었는데, 칭경예식이 취소되면서 일반을 대상으로 소춘대유희를 공연했던 것이다. 공연의 감상을 기록한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프로그램은 풍악을 갖추고, 광대의 판소리, 잡가, 탈춤패의 탈춤, 무동패의 무동놀이, 남사당의 땅재주, 쌍줄타기, 기생의 춤이었다.
소춘대유희는 1902년 12월 4일부터 협률사에서 공연되었다. 며칠간 행해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해 12월에 계속 공연이 있었고, 저녁 여섯시에 시작하여 밤 열한 시에 마쳤다. 소춘대유희는 서양식 극장에 전통 연희물들이 처음 올려진 공연으로, 한국 공연예술의 근대적 기점이라 하겠다. 서양식 극장 무대에 맞게 전통 연희물들이 적응했을 것이며, 극장을 중심으로 한 공연 유통 체계에 들어가 입장료를 받은 만큼 연희물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또 관객은 계층 구분 없는 불특정 대중을 상대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희가 중심 프로그램이었지만, 궁중에서 춤추던 관기의 궁중무가 처음으로 일반을 대상으로 서양식 극장 무대에서 공연했다. 궁정과 민간의 공연종목이 함께 상업극장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소춘대유희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니, 경성이라는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도시적 오락 유흥문화가 활성화되고 민간인의 오락욕구가 팽배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공연이 협률사에서 몇 년간 계속되었고, 1907년 경성에 만들어진 사설극장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올려졌다. 소춘대유희의 공연방식은 1910년대 사설극장의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