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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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인물
일제강점기 ‘개성제도업조합’을 결성하여 고려청자 재현 기술의 보급과 후진 양성에 힘쓴 공예가. 도예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고종 31) 5월 17일
사망 연도
1950년 1월 19일
본관
창원
출생지
서산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개성제도업조합’을 결성하여 고려청자 재현 기술의 보급과 후진 양성에 힘쓴 공예가. 도예가.
생애

1894년 5월 17일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거성리에서 빈농인 황씨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에 괴질로 부모를 여의고, 열 살 무렵까지 큰아버지 집에서 성장하다 큰아버지가 사망하자 1904년에 홀로 상경했다.

16세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청자공방인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에 들어가면서 도자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고려청자 기술 재현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본격적인 도자기 공부를 위해 일본에 머물렀다. 귀국 후 장충단공원 부근의 일본인 청자공방과 영등포의 ‘오오츠카(大冢)’ 청자공방에서 일하였다.

1929년 영등포 모래말(현재 도림동 부근)에 처음으로 자신의 청자공방을 열었으며, 1935년 만주사변의 영향으로 대방동으로 이전하여 축소 운영하였다. 1937년에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고려청자연구소(高麗靑磁硏究所)’라는 청자공방을 열었으며, 경기도청과 개성시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개성제도업조합(開城制陶業組合)’을 결성하고 실무 책임을 맡았다.

술과 낚시를 즐겼던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1950년 1월 19일 56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고려청자의 재현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단절된 고려청자를 재현하고자 했던 그의 뜻은 아들, 딸인 황종구(도예가,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황종례(도예가, 전 국민대학교 교수)에게로 이어졌다.

활동사항

1910년 전후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공방인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를 통해 도자기를 처음 접하게 된 후, 단절된 고려청자의 제작기술을 되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919년 초 일본인 경영자의 주선으로 본격적인 도자기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조선인에 대해 배타적인 분위기와 도자기 기술전수의 폐쇄적 속성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923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장충단공원 부근의 일본인 청자공방에 도공으로 취직해 주로 번조(燔造)일을 맡아서 하다가, 영등포의 ‘오오츠카(大冢)’라는 일본인 청자공방으로 자리를 옮겨 2~3년간 일하였다.

20여 년간 일본인 청자공방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기술을 배웠으며, 이를 바탕으로 1929년 영등포 모래말(현재 도림동 부근)에 처음으로 자신의 청자공방을 열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으로 공방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1935년 공방의 규모를 축소하여 대방동으로 이전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 때 당시 총독부 기술고문으로 와 있던 하야시 히사오(林 久男)를 만났다. 하야시는 청자 재현 기술과 일어에 능통한 황인춘을 경기도 공업시험소의 촉탁기술자로 위촉하고 전국의 요업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하려고 했다. 고려의 옛 수도 개성에서 고려청자를 부흥시켜 보자는 하야시의 권유로 1937년 개성시 선죽동 선죽교 건너편에 ‘고려청자연구소’라는 공방을 열었으며, 경기도청과 개성시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개성제도업조합’을 결성하고 실무 책임을 맡았다. 개성 시내의 보통학교 졸업생을 매년 10명씩 모집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청자 재현 기술의 보급과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현재 남아 있는 11점의 작품들은 한 점을 제외하고 대부분 개성요(開城窯)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그의 청자는 깊이 있는 청자 빛깔을 재현했으며, 높은 완성도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당시까지 사용 중이던 우리나라 재래식 등요가 아닌 일본의 개량식 등요를 사용해 경제성과 효율성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는데, 이후 국내 도자공방에서는 점차 개량식 등요를 사용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근대를 보는 눈-한국근대미술 : 공예』(국립현대미술관, 얼과알, 1999)
『한국도예』(신상호, 홍대도예연구소, 1996)
「고려청자의 재흥자 도공 황인춘」(최공호, 『월간공예』통권6호, 19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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