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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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복역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고종 25)
사망 연도
1950년
출생지
경상북도 경산
관련 사건
3∙1운동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복역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내용

1888년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병우(徐丙佑), 홍주일(洪宙一), 이만집(李萬集), 김마리아 등과 시위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2년 간 복역했다. 이후 희도보통학교(현재 대구종로초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대구요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해방 후 과도입법의원을 거쳐 제헌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재임 중 1949년 동료의원 99명과 함께 축첩공무원 추방에 대한 의견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1977년에 독립운동 경력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2년 7월 8일에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의정총람』(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
「부일협의자안 입의에 상정토의」(『동아일보』, 1947.4.25)
대한민국헌정회(www.rokps.or.kr)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www.mpva.go.kr)
집필자
손동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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