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제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아우내 장터에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고, 남편 유중권이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자 일본 헌병에게 항의하다가 역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유중권(柳重權)의 부인이고, 유관순(柳寬順)과 유우석(柳愚錫)[柳官玉, 柳俊錫]의 어머니이다. 1875년 11월 7일 태어났고, 1919년 4월 1일 사망하였다.
1919년 4월 1일 전개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일어난 3 · 1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이 3월 5일의 남대문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고향에 내려와서,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동네 어른인 조인원(趙仁元) 등에게 보이고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천안군 갈전면(葛田面)에서는 조인원을 중심으로 김구응(金球應) · 김상철(金相喆) · 박종만 등이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고, 인근 수신면(修身面)에서는 홍일선(洪鎰善) · 김교선(金敎善) · 한동규(韓東奎) · 이순구(李旬求), 성남면(城南面)에서는 이백하(李伯夏) 등이 함께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은 주민들과 함께 병천의 아우내 장터로 모였다. 이에 이소제도 남편 유중권과 딸 유관순, 조인원 등 용두리 주민들과 함께 아우내 장터로 나아갔다.
조인원 등이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 군중 500~600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김교선 · 김상철 등도 합류하였고,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들이 호응하여 시장 일대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뒤 헌병 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총칼을 휘두르고 군중들에게 실탄을 발포하여 유중권 등 많은 사상자가 났고, 시위 군중은 일단 후퇴하였다. 일시 해산했던 군중들은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재집결하여 헌병 주재소로 몰려가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였고, 일본 헌병은 다시 총격을 가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총격을 피해 시장 부근에 모여 있던 일부 군중은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시위를 벌였다.
세 차례에 걸친 일본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남편 유중권의 순국에 항의하던 이소제도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