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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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19년 3월 30일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내용 요약

김석운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0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3,000~4,0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군중들은 맞서 싸워 헌병주재소 건물과 헌병 숙소 등을 파괴하였다. 일본 헌병의 사격으로 김석운은 현장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주요 활동

1919년 3월 30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古寧朔面)에서는 영산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영산시장은 면소재지인 구창동에서 열렸다. 정오 12시경 영산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고,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3,000~4,000명에 달하였다. 김석운은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이에 헌병주재소 헌병 2명과 헌병 보조원 3명이 2개 조로 나뉘어 출동하였다. 해산을 종용하던 헌병과 헌병 보조원들은 곧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1개 조의 헌병이 총을 쏘았지만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달려들어 헌병에게 부상을 입히고 총을 빼앗았다. 총성을 듣고 달려 온 다른 1개 조 헌병도 군중과 격투 끝에 총을 빼앗겼다.

헌병 보조원 3명이 약 60발을 발사하자 군중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헌병 보조원들은 부상당한 헌병 2명을 들쳐 업고 주재소로 물러갔다. 그러나 헌병과 헌병 보조원들의 연이은 총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에 군중들은 분노하였다.

주재소로 몰려간 군중들은 맹렬히 돌을 던져 문과 창문, 설비 등을 전부 파괴하고, 병기고에 있던 보병총(歩兵銃) · 군도(軍刀) 등을 빼앗았다. 이어 헌병 숙소로 몰려가 문, 창문 등을 전부 부수고 가구와 옷가지를 꺼내 불태웠다. 헌병들은 탄약 상자를 가지고 주재소 뒤편으로 도망가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수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오후 7시 30분경 시위는 점차 진정되었다.

이날 밤 의주에서 파견한 헌병 2명, 군의(軍醫) 1명, 간호병 1명이 도착하고, 다음날 보병 11명이 출동하여 주변을 수색하고 빼앗긴 총기와 군도를 회수하였다. 이날 시위대 측에서는 5~7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일제는 사망자를 포함한 시위대 측 사상자를 최대 15명으로 집계하였다. 이날 시위로 인해 검거된 사람은 41명에 달하였다. 선두에 서서 시위 군중을 이끌던 김석운은 현장에서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독립문화사, 1965)

신문 · 잡지

『독립신문』(1920. 4. 20.)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집필자
이동언(선인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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