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하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아우내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아우내 만세운동은 아우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아우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작되었다.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고, 이성하도 이때 시위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東面) 수남리(壽南里) 출신으로, 1859년 11월 13일 출생하였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경성에서 3 · 1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유관순(柳寬順)이 마을 사람들에게 3 · 1운동의 상황을 알리면서 시작되었다.
3월 16일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교회에서는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작은아버지 유중무(柳重武) 및 조인원(趙仁元),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東奎), 이순구(李旬求),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이 모여 거사를 논의하였으며, 4월 1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주변 지역으로까지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3월 31일 밤, 유관순이 매봉산에 올라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횃불을 올리자 연기, 진천, 청주 등 주변 24개 지역에서도 봉화를 올려 거사에 함께할 것임을 알렸다.
4월 1일 오후 1시경 조인원은 큰 태극기를 매단 장대를 세우고, 장터 한가운데 쌓아 둔 쌀가마니 위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3,000여 명의 군중들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함성 소리를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창검을 휘두르고 총격을 가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김상철(金相喆) 등이 이끄는 100여 명의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 유리창을 부수고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는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오후 4시경 천안에서 급파된 군 병력이 도착하여 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현장에서는 19명의 사망자와 4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성하(李星夏)도 이때 일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