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관동창의진(關東倡義陣)과 13도창의군에서 활동한 의병장.
이칭
강선집(姜善集)
청은(淸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8년 11월 11일
사망 연도
1909년 11월 30일
본관
진주(晉州)
출생지
경기도 가평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96)
내용 요약

강윤희는 대한제국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 설치된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여 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한편, 각국 공사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관동창의진과 13도창의군에서 활동하였으며,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춘천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의
대한제국기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관동창의진(關東倡義陣)과 13도창의군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및 인적 사항

강윤희(姜允熙)는 1868년 경기도 가평에서 부친 강필형(姜苾聲)과 모친 청주경씨(淸州慶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字)는 선집(善集), 호는 청은(淸隱)이다.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김선희(金善熙)이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의병장 중남(中南) 이인영(李麟榮), 왕산(旺山) 허위(許蔿), 송운(松雲) 정운경(鄭雲慶) 등과 교유하였으며, 천문 · 지리 · 병서(兵書) 등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주요 활동

1905년 주1이 체결되자 서울에 설치된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여 김동필(金東弼) · 경현수(慶賢洙) · 이봉학(李鳳學) · 강원형(姜遠馨) · 이인순(李麟淳) · 유동희(柳東熙) · 이상린(李相麟) 등과 함께 조약의 파기와 주2의 처단을 주장하는 주3을 올리는 한편, 각국 공사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호남의 유생 기산도(奇山度)와 함께 을사오적의 처단을 도모하기도 하였으며, 평안북도로 이거하여 활동하던 중 민영환(閔泳煥)의 자결 소식을 듣고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혈죽부(血竹賦)」라는 시를 지어 기고하였다.

1907년 10월 이인영 의병장이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은찬(李殷瓚) · 이구재(李九載) 등의 추대로 관동창의대(關東倡義隊) 대장에 추대되자 강윤희는 부장(副將)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군이 전개한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강윤희는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편성하고 강원도 양구군과 화천군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맞서 산악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5월 11일 화천군 남면(南面) 완강리(莞江里) 산중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었으며, 경성재판소 춘천지부에서 내란죄 등의 혐의로 교수형을 받았으며, 1909년 11월 30일 형이 집행되어 춘천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묘소는 가평군 청평면(淸平面) 대성리 오리동에 있으며. 강윤희의 활동을 기록한 묘비가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가평군지』 3(가평군사편찬위원회, 2006)
『독립유공자공훈록』 14(국가보훈처, 2000)
신현정, 『가평독립운동사』(가평향토문화추진협의회, 1985)
『고종시대사』 6(국사편찬위원회, 1967)
주석
주1

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    우리말샘

주2

구한말에 을사조약의 체결에 가담한 다섯 매국노.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3

임금에게 올리던 글. 주로 간관(諫官)이나 삼관(三館)의 관원이 임금에게 정사(政事)를 간하기 위하여 올렸다.    우리말샘

집필자
황민호(숭실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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