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는 비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는 전도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강조하는 교단으로서 특히 중생 이후 차원 높은 성결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중앙성결교회는 1907년 5월 30일 동양선교회 선교사 카우만(Charles. E. Cowman)부부, 킬보른(Ernest. A. Kilbourne)과 동양선교회의 도움으로 일본에 세운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 김상준, 정빈이 한국에 와서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최초의 성결교회이다. 초기에는 중앙전도관, 이후에는 무교정(복음)전도관, 무교정교회, 서울중앙교회로 불렸고, 현재의 명칭이 중앙성결교회이다. 1961년 성결교회의 분열시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중심 역할을 하다가 1974년 다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복귀했다. 현재 한국성결교회의 모교회라고 불리고 있다.
중앙성결교회는 1907년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종로 염곡(현 종로 2가)에 설립되었으나, 1908년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로 이전했고, 1909년 무교동(현 시청 뒤)으로 옮겨 1912년 카우만 부인의 도움으로 건물을 완공했다. 초대 목회자는 정빈이었으며, 김상준과 최홍은을 비롯한 여러 교역자들이 함께 사역하였다.
초기 복음전도관은 전도와 부흥운동에 힘썼고, 특히 1908년 겨울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에 다른 교파의 선교사, 교역자, 신자들이 참석하면서 다른 교단의 신자들이 복음전도관으로 옮기는 일도 발생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김상준과 정빈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왔으므로 이들을 친일파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동양선교회는 처음 몇 년간은 무교정전도관(중앙성결교회)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지만 1912년 아현동에 성서학원을 짓고, 이곳을 본부로 삼았다. 하지만 무교정전도관은 여전히 성결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3년 12월, 총독부는 성결교회가 믿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본의 천황 중심의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맞지 않는다고 성결교회를 강제해산하였고, 건물은 타인에게 넘어갔다.
광복 이후 동양선교회는 1948년에 건물을 다시 회수하여 교회를 복구하고, 명칭을 서울중앙교회로 바꾸었다. 1957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성결교회의 자리에 희년기념관을 짓기로 결정하고,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총회, 중앙교회가 함께 건축을 완공하면서 이 건물은 성결교회 총회와 중앙성결교회가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1961년 성결교회가 신학적인 이념과 연합운동 문제로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분열되자 중앙성결교회는 예성에 속하게 되었고, 이 희년 기념관에는 기성과 예성 사무실이 함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중앙성결교회는 각종 반공대회를 유치하는 등, 한국의 보수주의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중앙성결교회는 다시 성결교신학교 주도권 문제로 예성 측과 갈등하면서 예성에서 탈퇴하여 독립교회가 되었다. 그 후 1974년 기성 측에 속했던 이만신을 담임목사로 초빙하면서 중앙성결교회는 다시 기성으로 환원하였다. 1977년 성결교회 창립 70주년을 맞이하여 총회기념관을 짖게 되자 중앙성결교회는 무교동 건물을 매각하고, 그 일부를 받아서 현재 동대문 옆으로 옮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