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과이정절목」은 골자가 되는 일경강(一經講)의 도입 외에도 과거제 운영에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체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증광시 · 정시와 성균관 절제에 강경 시험을 도입하였다. 증광시와 정시는 초시 후에 삼경 중 1경을 자원하여 배강(背講)하는 일경강을 도입하였다. 성균관 절제에서는 제술 시험 후 거수인(居首人)에게 일경강을 강하는 선제후강(先製後講)의 시험 방식을 도입하였다. 전강에는 일경강을 시행한 후, 제술로 비교하여 거수를 가리는 선강후제(先講後製)의 시험 방식을 도입하였다. 생원 · 진사시에는 초시 후의 학례강(學禮講)을 폐지하고 소학강(小學講)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곧 알성시, 친림정시 등과 같이 시험 당일 합격자를 발표하는 시험을 제외한 모든 문과 시험에 강경 시험을 도입하였다.
둘째, 경과(慶科)의 시행 횟수와 선발 인원을 제한하였다. 경과 정시(庭試)는 연 1회로 제한하고, 알성시는 5인 이하, 관무재대거정시(觀武才對擧庭試)와 중시대거정시(重試對擧庭試)는 3인 이하, 도기유생전강(到記儒生殿講)은 2인 이하로 급제자 수를 제한하였다.
셋째, 국왕이 친히 시험하는 친림 소시(親臨召試) 곧 친시를 도입하였다. 문과는 초시 일경강 후와 복시 출방 후 두 차례에 걸쳐 합격자 일부를 국왕이 직접 시험하였다. 친시에서 불통자가 있을 경우, 응시 유생과 시관을 모두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강과 절제에서는 국왕이 직접 일경강을 시행하였다. 이를 통해 모든 문과와 성균관 시험에 국왕이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일경강 제도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과거제가 제술 시험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강경 시험을 도입한 것은 유생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국왕이 직접 시험을 주관하여 유생들이 국왕 앞에서 경서를 외워야 했기 때문에 유생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결국 시행 가부를 둘러싼 논란을 거듭한 끝에 1766년(영조 42) 영조 스스로 「대소과이정절목」의 시행을 철회하였다. 이로써 일경강 제도도 폐지되었다.
「대소과이정절목」의 도입은 일경강 제도를 통해 강경과 제술을 겸비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조선 초기의 이상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국왕이 전 과정에 개입하여 문과 운영을 주도하고자 했다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국왕의 과도한 개입은 오히려 이 시도가 중도에 폐기되는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이때 도입되었던 일경강 제도는 차후 과거제 개편안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