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모제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정부가 역관에게 무역자금으로 은화를 빌려주고 중국산 방한용 모자를 사오도록 한 제도.
이칭
이칭
관모(官帽), 모자(帽子)
정의
조선 정부가 역관에게 무역자금으로 은화를 빌려주고 중국산 방한용 모자를 사오도록 한 제도.
개설

관모제는 1758년(영조 34) 조선 정부가 각 관아에 비축된 은화(銀貨) 4만 냥을 역관에게 빌려주고, 그 중에서 외교에 필요한 경비를 우선 사용하게 하는 한편 남는 은화로 중국산 방한용 모자를 수입하여 국내에 판매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그러나 관모제는 정부가 직접 무역에 참여하여 이익을 보려 한다는 비판과 은화 비축량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 부딪치면서 1774년(영조 50)에 폐지되었다.

내용

17세기 중반 조선의 무역은 청에서 수입한 물화를 왜관에서 일본으로 넘겨 파는 중개무역의 형태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양의 일본 은화가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다시 중국과의 무역결재 대금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대청무역은 한편으로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경제변동의 한 축으로 작용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한 조선의 국내 상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는 청나라와 일본 간에 직교역이 시작되었다. 왜관을 통한 중국 비단 및 물화의 수출로가 봉쇄됨으로써 조선으로 들어오던 은화는 현격하게 줄었고 무역은 침체되었다. 조선 중개무역의 주체였던 역관이 이 여파에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역관들은 국내의 판로도 대부분 사상에게 빼앗기는 난관에 봉착했다. 역관에게 보장된 팔포(八包)를 제대로 채워 갈 수 없었고, 관아로부터의 자금 대출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관은 사행 기간에 쓸 예물 값 외에 정보 수집비, 교제비, 뇌물 등 공용은(公用銀) 명목의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역관의 어려운 처지를 돕고 무역의 이익을 보려는 목적으로 관모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역관이 수입한 모자는 중국 요동 중후소(中後所)의 모자창(帽子廠)에서 양털을 이용하여 만든 방한용품으로서, 주로 사대부나 부유층이 삼동(三冬)을 나는 데 사용하고, 다음 해에는 버리는 소비재성 사치품이었다. 수입된 모자는 서울의 모자전 상인[帽子廛民]·의주 상인·개성 상인에게 국내 판매를 위임시키고, 이들에게 모자 값과 이익의 일정량을 은화로 받아들임으로써 원금을 재 확보하고 이윤을 남겨 별사의 비용으로 비축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변천과 현황

관모제는 조선사회가 은화의 부족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시행된 제도였다. 따라서 관은 대출을 전제로 하는 중국산 모자 수입과 국내 판매를 맡은 상인에게서 모자 값을 되돌려 받는 일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관모 무역은 ‘천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화를 가지고, 삼동을 쓰면 내버리는 물건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짓’이며, ‘경사(經史)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모자를 무역하는 것은 금(金)을 연못에 던지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부가 직접 무역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부담도 작용하면서 1774년(영조 50)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공용은 마련과 외교경비 마련을 위한 방안은 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1777년(정조 1)에 제정 시행된 세모법(稅帽法)이었다. 세모법은 정부가 은화를 마련해 주었던 관모제와는 달리 사상(私商)들이 직접 그들의 자본으로 모자의 수입과 국내 판매를 전담케 한 것이다. 그 대신 조선 정부는 수입 모자에 과세하여 공용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모자 무역은 조선정부의 자금이든 사상의 자본이든 간에 국내의 은화가 청으로 유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무역은 가능한 한 빠르게 극복되어야 할 무역형태였다. 땅에서 나는 인삼으로 은화 유출을 막은 것이 홍삼 무역이었다. 18세기 모자 무역이 수입을 통해 외교상의 경비를 마련하려고 한 무역 형태였다면, 1797년(정조 21) 포삼제는 홍삼 수출을 통해 외교상의 경비를 해결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대청무역사연구』(이철성, 국학자료원, 2000)
Reevaluation of the Choson Dynasty´s Trade Relationship with Ch´ing Dynasty(Lee, Chulsung,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vo.l,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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