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의 팔포(八包)와 같이 의주상인에게 만포(灣包)라는 무역자금을 인정해 주면서, 책문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의 운영 규정이다.
책문(柵門)은 조선 후기 대청무역 발전과 사상(私商)의 성장을 살펴보기 위해 주목해야 할 지역이다. 책문은 압록강에서 약 120리 떨어진 곳으로 ‘변문(邊門)’혹은 ‘고려문(高麗門)’이라고 불렀다. 청나라가 만주 지역을 무인화(無人化)하기 위해 쌓은 버드나무로 만든 출입문인데, 조선 사행은 의주의 구룡연(九龍淵) 나루에서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 탕참(湯站)을 지나 이곳에서야 비로소 출입과 통관의 절차를 거쳤다. 책문은 봉황성장(鳳凰城將)이 맡아 다스렸다.
책문 마을은 원래 30~40호의 그다지 큰 촌락이 아니었다. 하지만 1780년(정조 4) 박지원(朴趾源)은 “책문 안에는 수많은 민가(民家)가 번듯하고 네거리가 쭉 곧게 펼쳐져 있으며,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질펀하여” 시골티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유는 조선 사행이 중국으로 갈 때와 다시 조선으로 되돌아갈 때, 이곳 책문 마을에서 대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역관과 사상은 그들의 책무와 역할에 따라 공인된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마제(餘馬制)와 연복제(延卜制)를 이용해 조선으로 물건을 반입하였다.
여마(餘馬)는 사행이 책문까지 들어갈 때 짐을 실은 말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여분의 말을 보내는 것이고, 연복(延卜)은 귀국하는 사행의 짐을 실어 내오기 위해 말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 여마와 연복은 주로 의주 상인이 담당했다. 연복 무역을 ‘만상후시’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책문에서의 밀무역이 성행하자, 1725년(영조 1)에는 책문후시를 엄금시키고, 역관들의 공인 무역을 육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책문후시의 불법화는 오히려 밀무역이 크게 번성하는 결과를 낳았고, 의주부의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이에 1754년(영조 30) 영조가 책문무역을 재개하면서 반포한 규정이 비포절목이다.
의주 상인의 책문무역이 다시 공인되자, 이에 따르는 각종 폐단을 막기 위한 규정이 필요했다. 역관의 팔포와 의주상인의 만포가 규정대로 채워지는지, 은화를 초과 반출하지 않는지에 대한 철저한 검사를 규정하였다. 만포는 정기사행인 절사에 1만 냥, 임시사행인 별행에 5천 냥, 자행(咨行)에 1천 냥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편 가지고 간 은화에 비해 수입한 물건의 값어치가 웃돌 경우, 범법자는 잠상의 형벌을 적용하고 물건은 몰수하도록 하였다. 포은(包銀)의 수검 책임은, 책문을 나온 이후는 서장관과 의주부윤이 맡게 하였고, 사행 기간의 은화 관리의 총책임은 정사(正使)에게 부여하였다.
사행의 짐이 책문을 나올 때, 서장관은 복명이 늦는 한이 있더라도 물건 수량을 철저히 점검토록 하였다. 무역이 끝난 뒤에는 비포문서를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책문에 남겨둔 은화의 수량도 기록하여 무역품의 총 값어치를 증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듯 작성한 비포문서 및 사행의 문기 등은 3~4인의 관리를 따로 두어 검토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역관과 사상(私商)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무역에서도 상호 경쟁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조선 정부의 정책에 관철시키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비포절목은 조선 정부가 의주상인의 책문무역을 다시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무역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폐단을 막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