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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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스크랜턴 선교사가 동대문 성벽 안에 시약소와 함께 세운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소속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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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2년 스크랜턴 선교사가 동대문 성벽 안에 시약소와 함께 세운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소속 교회.
내용

정동에 시병원을 운영하며, 정동 밖의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을 세우고, 애오개와 남대문 안에 시약소를 개설한 스크랜턴(W. B. Scranton) 선교사는 동대문 안에도 시약소를 열고자 하였다. 그는 동대문에 의료사업과 복음전도를 위해 1889년 대지와 가옥을 구입했지만 사업이 지체되어 1892년에야 비로소 동대문 집회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즈음 미국의 볼드윈(L. B. Baldwin) 부인이 보내온 선교비로 시약소와 예배당 건물이 지어졌고, 볼드윈 시약소(Baldwin Dispensary), 볼드윈 예배당(Baldwin Chapel)이라 불렀다. 이에 1892년 성탄절에는 볼드윈 예배당에서 성인 남자 1명과 소년 6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볼드윈 시약소는 여선교부에서 운영하였고, 여성 병원의 구심점이 되었다. 1899년에는 정동의 보구여관(普救女館)과 통합하여 동대문병원으로 승격하였고, 1912년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면서 ‘동대문부인병원’ 혹은 ‘릴리안 해리스기념병원(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으로 불렸다. 이 병원은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으로 발전했다.

볼드윈 예배당에서는 남녀가 같은 예배실을 사용하였는데, 주일예배에서 남녀가 동석한 것은 한국교회에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스크랜턴 대부인(M. F. Scranton)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이로 만든 칸막이를 방 가운데 길게 세워놓고 한쪽에는 남자, 다른 한쪽에는 여자가 앉도록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기 다른 출입문을 사용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함께 볼 수 있지만 남녀가 서로를 쳐다볼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서양 남자의 얼굴을 보고서는 놀라 달아나는 여성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이 방법은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스크랜턴 모자(母子) 선교사가 시작한 동대문교회는 이어 육영공원 교사였던 헐버트(H. B. Hulbert), 벙커(D. A. Bunker) 선교사 그리고 노병선 전도사가 담임을 맡았다. 이후 케이블(E. M. Cable), 이경직, 스웨어러(W. C. Swearer), 장낙도, 오기선, 손정도, 정춘수, 변홍규, 마경일, 오경린, 장기천 목사 등이 동대문교회를 맡아 성장시켰다. 그 가운데 정춘수, 오경린, 장기천 목사가 감독을 역임하였다.

동대문교회의 교육 사업을 살펴보면, 교회설립과 함께 시작한 볼드윈 매일학교는 1906년 동대문여자보통학교로 발전하여 여성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1942년 동구여자상업전수학교로 전환되었다. 1900년 개설한 흥인배재학교는 1918년 동대문유치원을 분립하기도 했는데 1944년 폐교되었다. 1973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한 예배당은 서울 성곽의 복원과 맞물려 2013년 말 철거되었다.

참고문헌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사』I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2007)
『한국기독교와 초기 의료선교』(신재의·김권정·조이제, 한국기독교역사문화연구소, 2007)
『동대문교회백년사』(윤춘병, 동대문교회, 1990)
집필자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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