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룡(方有龍)은 해방 후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에 맞는 한국순교복자가족수도회를 창설한 사제이자 그리스도교 영성을 한국의 정서와 언어로 적합하게 구현한 영성가이다. 해방 후 수녀회(1946년), 성직수도회(1953년), 재속복자회(제3회, 1957년), 빨마수녀회(1962년)를 창설하였다. 가톨릭 신앙을 동양적 정서 속에 녹여낸 고유한 수도 영성을 만들어 한국 문화 안에서 조화로운 토착화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겨레 복음화와 한국적 수도회 창설이라는 시대적 사명에 응답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방유룡(方有龍)은 1900년 3월 6일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서 아버지 방경희(方敬熙)와 어머니 손유희(孫柔嬉)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레오, 수도명은 안드레아이다. 호는 무아(無我),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신학교 학적부에 따르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9월 15일에 농업 학교를 자퇴한 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주1 6년과 주2 6년 과정을 마쳤다. 1930년 10월 30일에 사제로 주3.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한 방유룡은 자연스럽게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 또한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주4을 배워 많은 한문 서적을 통독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동양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아가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 고유한 한국적 영성의 기틀을 다졌으며, 동양의 정신 문화를 그리스도 영성으로까지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주5로서, 수도회 창설자로서 그의 영성에 중요한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사제 서품 이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본당을 시작으로 황해도 장연 · 신천 · 재령 · 해주 본당에서 앞서가는 사목으로 본당 공동체 화합을 이끌었으며, 당시 유교 관습으로 남아있던 성당 안 남녀 칸막이를 없애기도 하였다. 또한 남녀 청년 학생들을 모아 생동감 넘치는 젊은 교회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여 각 청년단체를 활성화하였다. 방유룡 신부가 미사를 드리는 경건한 태도에 끌려서 수도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주변에 모여들었고, 특히 젊은 지식인들이 그의 강론에 감화되어 주6 했다. 또한,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자 그동안 닫아 두었던 유치원을 다시 열어 지역 사회의 환영을 받았다.
개성본당에서 해방을 맞은 방유룡 신부는 겨레의 성화와 복음화를 위해, 순교 정신의 맥을 잇고자 1946년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하였고, 서울에서 가회동 · 제기동 · 후암동 본당 주임 주7로 사목하였다. 1953년에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하였다. 1957년에 서울교구 교구장 비서직을 사임하면서 주8를 완전히 떠나 자신이 창설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종신 주9을 하였다.
한국인 수도자를 양성하고 한국인 심성에 맞는 수도회 창설을 적극 추진하여 수녀회(1946), 성직수도회(1953), 재속복자회(3회, 1957), 빨마수녀회(1962)를 창설하여 한국순교복자가족수도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이러한 가족 수도회 창설은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루어낸 첫 열매이기도 하다. 한국순교복자가족수도회 창설자로서 약 27년간 수도자들의 영적 지도 신부로 활동하였다.
수도회 창설 초기부터 자신이 깨달은 신비와 영적 체험을 100여 편이 넘는 시와 영가(靈歌)로 기록하고, 이것을 미사 강론에서 자주 발표하였다. 또한 동양 문화를 바탕으로 한 여러 수도 용어(修道用語)를 창안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면형무아(麵形無我), 점성(點性), 침묵(沈黙), 대월(對越) 등이 있다. 이중 면형무아 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국인의 정서와 언어에 적합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한국 역사와 문화, 종교, 철학의 모든 전통을 담고 있어 한국 천주교회 토착화에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방유룡은 1986년 1월 24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그동안 교회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온 방유룡 신부의 명성이 한국교회와 신자들, 수도회의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2023년(선종 37년) 3월 23일에 방유룡 신부의 시복 주10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을 선언했다.